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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 연세대학교 |
우리말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혀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저절로 하게 된다. 먹고 놀고 자고 하는 짓과 별로 다름없이 쉬운 것이 우리말 하는 짓이다. 그런데 학교 공부가 시작되면서 우리말은 ‘국어’라는 재미없고 어려운 과목이 된다. 그러다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영어는 쉬운데 국어는 어려워서 영어 점수보다 국어 점수가 떨어지는 아이가 생긴다. 영어는 자신 있는데 국어는 영 자신이 없다고 하는 학생도 있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다.
제 나라말이 정규 학교 교육의 학과목이 된 것은 19세기 서양에서였다. 한 지역에 사는 민족, 또는 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단위로 하는 이른바 국민 국가가 국민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한 언어를 공식적 통용어 즉 ‘국어’로 정하여 국민에게 조직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국어’가 정규 학과목으로 편입된 배경이다. 그런데 학습이란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훈련 과정이므로, 교사들은 국어를 누구나 저절로 할 줄 하는 자연스러운 활동이 아닌 다소 어려운 지적 훈련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야 했다. 서양서도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랬다. 국어 교사들은 제 나라말을 바르게 잘하도록 가르친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멀리 벗어나 국어를 지능의 차이를 가려내기 위한 까다로운 학과목으로 세련시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우리말과 국어는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의식이 뿌리박혔다. 국어는 미적분처럼 골치 아픈 과목일 뿐 우리말과는 상관이 거의 없는 역겨운 것이 되었다.
우리말을 잘하고 잘 알아듣고 잘 쓰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말은 말하는 이의 지능지수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지능지수가 높아 수학 점수를 잘 받는 아이가 말까지 특별히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어 점수가 꼴찌에 가까운 아이가 말을 더 천연덕스레 잘 할 수 있다. 고등학교나 대학 입학 시험의 국어 문제를 우리말 잘하고 잘 듣고 잘 쓰는 사람이 풀 수 없다면 그것은 확실히 큰 문제가 아닌가? 그것이 우리말에 대한 의심과 공포와 나아가서는 염증까지 불러일으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국어’가 지능 훈련을 구실로 삼아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인 우리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 과연 옳기만 한지 반성할 때가 된 듯하다. 오늘날처럼 온갖 말이 거침없이 마구 범벅이 되어 쓰이는 환경에서, 기형적으로 발달된 국어 과목이 우리말 바르게 곱게 잘 하기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한즉, 지금 서양에서 한창 벌어지듯 국어 교육에 대한 전반적 개혁이 시급하다. 참 큰 일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