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도 국어학의 주요 일지
국어 정책 논저 목록
국어 교육  논저 목록
한국어 교육 논저 목록
음성학·음운론 연구 동향 논저 목록
형태론 연구 동향 논저 목록
통사론 연구 동향 논저 목록
어휘론·의미론·사전 편찬학
연구 동향 논저 목록
국어사·국어학사 연구 동향 논저 목록
문자·표기 논저 목록
방언·사회언어학 논저 목록
기타 논저 목록
정기 간행물 목록 논저 목록
정책과 제도
국어 단체 활동
국어 단체의 활동과 연구 성과
국립국어원의 활동과 성과
여론과 쟁점
한국어 교육과 번역
외국인 대상 한국어 교육
번역에 쓰인 우리말
한국어 교육과 능력 평가
2004~2005년도 국어 교육 동향 소고
국어 능력 시험 실시의 현황과 과제
국어 순화와 전문 용어 정비
국어 순화
전문 용어의 정비
특수 언어와 소수자의 문제
시각장해인,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의 언어 생활
소수자 언어 실태와 연구 과제
남북 언어
남북 학술 교류의 상황
남북 언어 교류 관련 학술회의
  남북 언어
 
남북 학술 교류의 상황
김하수 / 국립국어원

  1. 들어가기

  언론 보도 기관이 남과 북의 언어 문제를 거론할 때에는 적극적인 의미의 언어적 공통성 확대를 겨냥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하게 ‘이질화’되었다는 식의 표현을 이상하리만큼 즐겨 쓰곤 한다. 이미 남과 북의 언어 문제는 일찍이 이질화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전문가가 규정을 해 왔음에도 아직 그러한 보도 자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엿보이지를 않는다. 다른 영역보다도 유난히 전문가들의 견해와 세속의 흐름이 일치하지 않는 곳이 남과 북의 언어에 대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이미 여러 곳에서 지적들을 해 왔다시피 남과 북의 언어는 ‘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질적인 면으로 말하라면 영어나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같은 언어들이 가장 뚜렷하게 이질적이다. 남과 북의 언어가 동질적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명명백백한 증거로 아직도 서로 간에 방송 청취를 법으로 금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만일 남과 북의 언어가 진정 이질적이라면 굳이 청취를 금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금지하는 이유는 어떠한 언어보다도 사상과 감정, 그리고 각종 정보의 세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대단히 손쉽고 명쾌하게 전달되는 ‘동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에서 보이는 언어적 ‘차이’ 혹은 ‘편차’의 문제는 언어의 구조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내용의 문제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곧 문법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의미론적 내지는 화용론적인 문제가 더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론적 문제의 원인은 양쪽의 정치 체제도 아니요, 바로 의사소통의 단절, 더 정확히는 의사소통의 봉쇄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미 60년 이상 서로 딴 세계에서 살면서 인위적으로 편집 가공된 정보만 공급이 됐고, 지나친 관심은 곧 범죄로 단정하는, 따라서 의사소통을 꾀한다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는 우범자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었다. 결국, 우리 언어의 문제는 놀라울 정도로 언어학적이 아닌 정치적 선택항 속에서 소극적인 구실 외에는 제 기능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문민정부 이후 남과 북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결빙과 해빙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지난날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차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전진을 위한 통로를 찾지 못해 지지부진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러한 시기에도 비정치적인 분야에서는 꾸준히, 속도의 완급을 조절해 가며 서로 막힌 의사소통의 물꼬를 조금씩 터 왔다. 한때 호기심 차원에서 범람하던, 북에서 출간한 국어학 관계 서적의 복사본들도 우리의 눈을 틔게 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6·15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만남 이후 아무리 그 정치적 함의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꼬고 해도, 남과 북의 묵은 분노를 끊임없이 들추어내기만 하던 냉전 사상을 분명히 낡은 패러다임으로 흘러가게 한 것이 사실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남과 북의 언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복이 동시에 분단이 되었던 모순, 그래서 광복을 곧 해방이라고 느끼기엔 선뜻 그 동의성을 받아들이기 어렵기만 하던 이율배반, 내전인지 국제전인지 구별하기 곤란하기만 한 전쟁에 대한 악몽, 그 이후로 이어진 체념과 외면,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모조리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물꼬를 트는 한 번의 만남이 가지는 가치를 누구든지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언어 문제도 마찬가지로 한두 번의 만남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꼬를 트는 일 자체는 오랫동안 막혀만 있던 물길이 터져 나오듯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내는 첫 단추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2. 무슨 일이 있었나?

     2.1. 맞춤법

  서로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가 상대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성과의 접촉이 금지된 환경에서 대부분의 남녀는 이성에 대해 사실보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대학의 실상을 모르는 고교생이 대학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거의 몽상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적대적 감정의 주입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며 소통을 하지 못하던 두 집단의 상호 이해는 오로지 감정의 합리화밖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자체가 자신에 대한 배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희극에 가깝다. 우리의 언어 문제가 이러한 비극이자 희극의 공연에 단역으로나마 출연해 본 것은 언어가 정치나 역사의 문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당연한 명제를 그나마 재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준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깨달음이야말로 그동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수확이 아니었나 한다.
  냉정하게 돌이켜 본다면 우리의 언어는 아직 단 한 번도 이른바 ‘민족어’가 지녀야 하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킨 적이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 언어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식민지 시절엔 보조적 수단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분단으로 말미암아 단 한 번도 통일성 있는 민족어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냉엄한 조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오는 ‘국어학’이니 ‘국어사’니 하는 말들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사용되는 독일어도 비록 국경은 달리하지만 위에서 거론한 사회역사적 조건은 모두 만족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언어 현실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혹은 백러시아어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의 언어는 ‘민족의 언어’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언어에 대한 애정이나 국어운동에 대한 열정을 일으키기에는 적극적인 조건이 되기는 하겠지만 객관적인 자기 성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의 언어는 근대화 운동 시기에 일종의 언어에 대한 자각 운동을 경험하였고, 그 이후 식민지 시대에 가서야 본격적인 ‘언어의 근대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한글맞춤법’이니 ‘표준어 사정’이니, 또 ‘사전 편찬’이니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는 언어 전문가들만이 아닌 선구적인 작가들의 공헌도 대단히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들이 사회 제도로 정착하기에는 시간도 너무 없었고, 또 결정적인 것은 제도화할 수 있는 권력의 부재였다. 이러한 약점을 일거에 떨치고 만회할 수 있었던 기회는 광복의 시점이었으나, 이 역시 분단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약 반세기는 전쟁과 반목, 그리고 증오로 이 좌절감을 달래며 서로 다른 길로 발전의 길을 틀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은 결과를 두고 그동안의 정치적, 경제적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이 지면의 성격과는 걸맞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처절하게 분노를 내뿜으며 대결을 해 오면서도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게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정을 술회하며, 이제 거의 60년 만에 분단과 언어적 소통의 단절을 극복해 나가는 길목에 선 2005년 직전까지의 상황을 큰 그림으로 그려 보면서, 새로운 기획과 전망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분단으로 말미암아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을 잃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을 통하여 더 중요하고 더욱더 큰 것을 보상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닦는 지혜를 얻는다면 지금까지 겪어 온 역사의 가시밭길은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언어의 표기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잘 알려졌다시피 1933년에 조선어학회의 주도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미 그전에 총독부의 보통학교용 철자법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근대적 윤곽을 잡아가던 맞춤법은 이때부터 형태소 표기를 원칙으로 한 오늘날의 표기 규범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그 내부에서의 진통도 적지 않았겠지만 외부에서의 반대와 공격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승빈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정음파’의 비판이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맞춤법을 선호하는 그들은 표기 규범에 문법론적인 형태소 표기를 강화하는 조선어학회 측의 주장을 거부하였으나 이미 시대의 발전 속도는 그들이 원하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글맞춤법을 비판하는 이들이 이른바 ‘형태주의’라는 (부적절한) 용어를 빌려 전래의 대중적 표기(역시 ‘음소주의’라고 부적절하게 일컬어짐)는 이미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 혹은 사회적 변두리에서 보조적으로 사용되면서 서서히 정착해 가던 이 표기법은 워낙에 짧은 역사적 경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문헌에 전면적으로 시행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만일 이러한 표기가 채택이 된다면 한글로 우리의 문헌을 전면적으로 표기해 내기에는 또 몇 세기의 세월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신생 한글맞춤법이 지닌 문제는 지나치게 분석적이어서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사용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도 후에 교육 제도의 발전을 통하여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발전적이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광복 이후, 우리 언어의 자율적인 발전의 길은 갑자기 확 트여 버렸다. 이미 언어와 표기에 대한 규범은 미진하나마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의 사회적 관철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 권력은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서로 배타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한 두 집단에 의해 나누어졌기 때문에 자칫하면 언어와 문화가 모두 ‘역사적으로 분할’되어 버릴 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분할되었었지만 이미 그들은 18세기에 시민 문화를 완성하여 공유하고 있었고, 19세기에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루어낸 경험이 있었다. 더 나아가 세 번에 걸쳐 ‘제국’을 형성하고 해외에 식민지까지 운영해 본 역사적(그리고 제국주의적) 경험까지 가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소왕국 출신으로 식민지화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분할된 우리와는 애당초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떻든 분할된 남과 북은 일단 언어의 표기 규범을 1933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기본으로 삼는다. 통일안의 취약한 부분에 대한 문제는 뒤로 미뤄 두고, 모든 것이 서로 엇나가는 남과 북의 사회 체제에 이것만이 거의 유일한 공통분모가 아니었는가 싶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분단된 60여 년의 세월 동안 남과 북은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불길을 되살려 주는 쏘시개의 구실을 톡톡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33년에 일단 완성을 본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어디까지나 ‘안(案)’의 형태였다. 그리고 이 ‘안’은 그 후에도 조선어학회(후에는 한글학회) 자신의 손에 의해서도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실제 시행되지 않은 한글맞춤법(1980)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 차례이고, 외래어 표기법, 한글 로마자화 규정, 한자 표준 독음법 등 넓은 의미의 표기 규범의 변화까지도 점검해 본다면, 우리의 한글맞춤법은 처음부터 완결성을 갖춘 후에 몇 가지를 뜯어고쳤다기보다는, 열악한 상황에서 일단 기본적인 뼈대만을 완성한 후에 차차 조금씩 개선해 나가던 중, 다시 말해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단일성을 확보해 주는 주요한 도구인 권력의 이분화로 말미암아 언어와 표기의 규범은 두 갈래의 길을 걸어나가게 되었다. 1948년 북에서는 ‘조선어 신철자법’을 마련하였다가 제대로 실행을 보지 못하더니 1954년에는 ‘조선어 철자법’을 공포하여 이전의 한글맞춤법과 결별을 고하게 된다. 1948년 북에서 시도한 ‘조선어 신철자법’은 우리 말의 음운 체계를 대단히 분석적으로 구성하려 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범이 되어 버려 사실상 ‘인민의 표기 수단’이라기보다는 ‘전문가의 연구 성과’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주도자라고 짐작되는 김두봉의 정치적 위상 변화에 따라서 이 신철자법은 사장되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1954년)에 남한에서는 잘 알려졌다시피 ‘한글 파동’이라는, 이른바 ‘한글 간소화’라는 다른 표현으로도 알려진, 정치와 문화가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표기 규범이 권력자의 지시에 의해서 정부와 학계를 긴장 관계 속에 몰아넣고 약 일 년 동안 표류 기간을 지냈다는 중대한 사건은, 적어도 남과 북의 맞춤법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일찌감치 포착되었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건은 단순히 시사보도 자료의 한계나 맞춤법의 역사 속에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어학 사조사와 정치 사조사가 함께 이루어 낸 하나의 역사적인 ‘문제 발생 및 해결’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 점에서 본다면 이 한글 파동은 오로지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이미 그 이전부터 충분한 예고를 두고 진행된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옳다고 본다. 이미 1949년 10월 9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한글맞춤법에 대한 불만을 담화를 통해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26일에, 또 1950년 2월 3일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었으나, 그 이후 전쟁 동안 이 문제는 잠잠해졌다가 1953년 4월 27일에 당시 국무총리 백두진의 훈령 제8호로 강행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또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관찰을 해 본다면,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이승만의 관점과 상당히 비슷한 시각에서 맞춤법 문제를 바라본 박승빈, 안확 등의 주장 및 그러한 주장을 배태해 온 일련의 사유 방식과 같은 궤를 걷고 있다고 연결을 지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한글맞춤법의 대항 논리를 가졌던 세력은 사실 이때에(1953~54) 막강한 정치권력을 매개로 하여 그때까지의 20여 년간의 우열의 판세를 뒤집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실 진정한 ‘최후의 결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 그와 같은 시각의 맞춤법을 주장하는 이론이나 집단은 소멸 상태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54년 전후에는 남과 북, -어느 쪽이 먼저 저질렀느냐를 떠나서-, 양쪽에서 맞춤법에 대한 정치권력의 깊숙한 개입이 사실상 동시기적으로 있었다는 것이 역사 감각이 있는 판단이 될 것이다. 물론 그 개입의 함의는 전혀 다르다. 남쪽에서의 개변 목표는 구시대로의 복귀인 동시에, 형태소 표기에서 음운 표기와 인습적 표기의 혼합 형태를 지향하고 있었고, 북쪽에서의 그 목표는 형태소 표기의 철저한 관철이라는 (남쪽의 시각에서 본다면) 다소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다. 또 그러한 상반된 성격은 당시 양쪽의 사회정치 구조를 대단히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남한과 북한에서 벌어졌던 맞춤법 개정은 단순히 ‘달라짐’이나 ‘분단 고착’이라는 관점보다는 1933년에 이루어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들의 불만이 그간의 정치권력의 변화 및 분단으로 말미암아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양쪽의 정권들이 지닌 이념의 본질이 여지없이 노출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한글맞춤법은 적어도 세 가지의 상반된 입장의 갈등 속에서 탄생하여 안정되어 간 것으로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옳다. 그 하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주도한 조선어학회이고, 이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 잘 알려졌다시피 박승빈이 중심이 된 조선어학 연구회의 견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일반 국어학사에서는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예(조선어 신철자법(1948))에서 보다시피 김두봉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인 ‘형태소 및 형태음소의 정밀한 표기’를 원한 견해도 있었음이 드러난다.
  북한의 경우는 1948년 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그 권력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던 김두봉의 노력을 통하여 위에서 말한 세 번째 유형의 맞춤법, 즉 매우 급진적인 표기 체계의 시행을 꾀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체계 자체가 여간 해서는 대중화되기 어려운 속성으로 말미암아, 1954년 「조선어 철자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사회적 현실을 감안한 형태로 물러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위에서 갈래를 잡은 세 견해 가운데 첫 번째의 조선어학회 안을 기반으로 하며 좀 더 체계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절충한 모습으로 고쳤고, 남한은 첫 번째 조선어학회의 안에서 두 번째 조선어학연구회의 안에 가깝게 바꾸려다가 실패를 한 셈이다.
  이러한 윤곽을 놓고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이 광복 이후의 남북한 정국과 관련된 한글맞춤법의 동요 내지 논란의 흐름을, 지금까지 통용되던 설명보다는 더 구조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민족어 운동의 기선을 잡은 조선어학회는 조선어학 연구회 측의 매운 비판을 극복하면서 일단 가장 신뢰할 만한 대안의 규범을 제시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통한 그들의 정통성 확립은 광복 후에 이렇다 할 이의 제기 없이 새 사회의 언어 규범의 기초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조선어학 연구회류의 견해 내지는 그들과 유사한 문제의식은 뜻밖의 옹호자이자 개입자 이승만을 만나게 된다. 강력한 정치적인 위치를 가진 이승만은 일 년여 동안 맞춤법의 개정을 집요하게 추구하였으나, 이미 그의 주변에는, 박승빈도 고인이 되었으며, 그밖에 학문적인 뒷받침을 제대로 해 줄 수 있는 세력이 매우 빈곤하였다. 일부 충성스러운 관료들의 힘만 업고 그 큰 사업을 성공시키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국무총리 훈령이 나온 지 일 년이 지나서인 1954년 9월 19일이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정치 문제로서의 ‘한글 파동’은 짧게는 일 년 동안, 길게는 5년 동안 남한 사회의 표기 규범의 중대한 대전환을 일으킬 뻔한 채, 역사 속으로 묻혀 갔다.
  한편, 북한 역시 새로운 정치권력을 획득한 집단의 힘을 통하여, 매우 언어분석적이고 문법 규칙에 경도된 또 다른 맞춤법이 거의 같은 시기에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한 구체적인 불만, 즉 형태주의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등의 비판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새 맞춤법 주도자들 역시 충분한 동지들을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김두봉 한 개인의 몰락에만 비추어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만일 이 「조선어 신철자법」이 학자들과 대중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결코 김두봉 개인과 운명을 같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증오나 정치적 대결 의식만을 이유로 이 표기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역사와 사회를 매우 순진하게 들여다본 소치이다.
  결국, 이 시기가 우리의 맞춤법 역사에서 차지하게 되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보수적인 맞춤법으로 보수화하려던 남한과, 급진적인 맞춤법으로 급진화하려던 북한 내부 세력들이 각기의 정부 수립 후에 목표 달성을 위하여 회심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실패해 버린 것이다. 다시 남은 것은 한글맞춤법 통일안이었다. 양쪽의 맞춤법이 크게 달라질 뻔하다가 다시 어느 정도 비슷해진 것이다.
  남과 북의 맞춤법 차이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이제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1950년대 중반까지 치열한 공방과 함께 약간의 수정을 거듭해 온 남쪽의 한글맞춤법과 북쪽의 조선어 철자법 사이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는 뚜렷하다. 그러나 이것은 남과 북이 함께 나눌 공통성의 저해 요소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통성의 근거로 보아야 한다. 그 까닭은 위에서 정리해 본 역사적 의미의 공통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양쪽 다 심한 보수화와 급진화를 거부하였다는 것은 앞으로의 재결합의 실마리를 남겨 두었다는 긍정적인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맞춤법이나 국어 문법(특히 그 이후의 문법 용어 파동과도 관련하여) 등과 관련된 사건을 사회사나 국어학사의 지엽적인 일화 정도로나 다룰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국어학 사조사와 정치 사조사가 함께 이루어 낸 하나의 사회사적인 문제와 과제라는 의식을 가지고 구조적인 파악을 해야 할 것이다.
    

     2.2. 표준어

  언어는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표준어라는 개념은 근대 사회의 산물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 평민들은 자신들의 입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것이 지역에 따라 방언이 되기도 하고 종족에 따라 종족어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의 의사소통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애당초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였다. 그에 견주어 지배층은 폭넓은 의사소통 기능을 가진 공통 글말을 사용하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중세 유럽은 라틴어, 동아시아는 한문, 중동 지방은 아랍어와 페르샤어가 이러한 기능을 맡았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중세기부터 ‘도시’가 발전하면서 제후들의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민들이 형성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도성과는 이러한 ‘도시민들의 자유’라는 조건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 도시민들은 각 지방에서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서로 다른 방언들이 섞이면서 언어의 중화 현상이 일어났다. 지방색이 옅어지고 반대로 어떤 지방어와도 약간의 소통이 되는 그러한 기능이 중화 작용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한 도시민들의 언어 가운데 가장 중화가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 바로 수도의 언어였다. 왜냐하면, 수도는 무력한 국왕의 직할 영지였기 때문이다. 가장 취약한 권력의 지배 지역이야말로 자유로운 도시민에게는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수도의 언어는 훗날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가장 의사소통 범위가 넓은 탈지역적인 언어로 공용어 혹은 표준어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우리의 언어는 이와 같은 경로를 밟아 올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서울말은 비교적 가장 중화 현상이 풍부한 언어였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거의 9세기에 걸쳐 권력의 중심부로 만들었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발전과 도시민의 자유라는 외국의 앞선 경험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도 공통성이 강한 언어 변종을 지녔다는 행운을 역사의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자신을 물질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수단, 즉 글자를 가지게 된 것은 대단히 최근의 일이다. 글자의 역사에서 500년이라는 기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의 한글은 문자의 역사에서 아직은 미성년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 한글의 장점을 말하고 자랑도 하지만, 사실 그러는 중에 매우 중요한 약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얼마나 오래 사용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표기 방식이 쉽게 고정이 되지 않는다. 한글의 표기법이 항상 유동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우둔한 대중의 착각이 아니다. 역사적인 현실이다.
  게다가 한글은 창제 이후 활발하게 사용된 적도 없다. 일부 문헌 번역, 약간의 문예 작품, 개인들 간의 은밀한 기록인 편지 등에나 사용되면서 거의 400년의 세월을 보내왔다. 혹은 문헌어인 한문에 토를 다는 방식으로 보조적 기능을 수행해 왔을 뿐이었다. 이러한 한글을 1894년 갑오경장 때 공문서에 사용하게 되었으니 문헌 기록용 글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설픔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독립신문의 문체 역시 글말과 입말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 글자의 사용자 자신도 무척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는 호감을 주었을 것이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경멸감을 주기에 족했을 것이다.
  공공 영역에서 안 쓰이던 언어를 갑자기 쓰려면 무엇보다 다양하고 어슷비슷한 변이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가 가장 난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변이형 가운데 가장 ‘사회적 우세’를 나타낼 수 있는 형태가 선택되겠지만 그러한 가치가 확실치 않은 변이형들이 공존할 때에는 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병용하다 보면 그 의미가 공공성을 잃어 버리게 마련이다. 언어의 공공성을 형태적으로 강화하려면 해당 사회의 지배적인 문서, 즉 종교 경전, 교과서, 공문서, 사전 등에서 정리를 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이다. 그러한 정치문화적인 기반이 약하면 어쩔 수 없이 인위적으로 언어 계획을 수립하여 정책적으로 조정해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언어는 이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력도 없었고, 제도적 뒷받침도 없었으며, 지배적인 종교도 없었다.
  우리의 언어에 공용어의 기능을 얹어 주고 우리의 글자로 모든 것을 표기할 수 있게 해 준 힘은 지배 구조의 중심에서 나오지 않았고, 변두리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전통적인 지식인이 아닌 신흥 지식인으로부터 동력을 얻었다. 당시 전통 종교인 유교나 불교가 아닌 일종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선교 활동에서 한글을 활용하였고, 과거의 선비가 아닌 평민 문필가들이 우리의 언어와 글자로 감성을 풍부하게 표현했다. 신식 교육의 교과서에, 새로운 여론 매체에 이런 현상이 속속 나타나면서,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글자의 발전은 구세력이 아닌 신세력에 의해 달성될 것이라는 예견이 충분히 가능했다.
  당시 조선어학회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세력의 일부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와 식민지 사회라는 굴레는 애써 만들 산물에 이러저러한 약점을 많이 남겼고, 반대 세력과 대결하는 데에 많은 기력을 낭비해야 했다. 이들에 의해 처음 제도화된 조선어 표준말은 1936년에 나왔으나 여러 가지의 아쉬움을 남겨 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때의 표준말 사정은 사정 편찬의 선행 과정이었다. 표준어의 전반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우선 대상 어휘도 충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사전을 위한 용도로 다루다 보니 지나치게 ‘형태’ 중심의 판단을 내렸다는 아쉬움이 있다. ‘의미’를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해서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의미 혹은 함의를 가질 수 있음에도 비표준형의 낙인이 찍힌 것도 보인다.
  사실 이 과정에서 더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한자어를 불철저하게 다룬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사전에 올라 있는 한자어의 다수는 별로 통용되지 않는 어휘이다. 또 그 의미가 전근대적인 경우도 무수히 많다. 옛 문헌에만 있는 어휘나 전근대적인 의미의 어휘는 이때 ‘고어’로 처리했어야 했다. 오늘날도 우리 어휘의 반 훨씬 넘는 양이 한자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낡은 어휘를 정리하면 아마도 반을 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공용어를 구성하는 뼈대인 표준 어휘는 사전을 편찬하면서 그 양이 착실히 늘어 갔다. 그러나 사전 편찬은 표준말 사정 이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늦춰져 결국 광복 이후에나 가능해졌다. 그 결과 사정도 남과 북이 따로 내게 된 것이다.
  우리 언어의 현대화 작업에 몰두하던 조선어학회 역시 광복과 함께 분할되었다. 그 주도적인 구성원들 가운데 비교적 진보적인 색채를 띠었던 이극로 등은 북으로 가서 오늘날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의 전신을 일구어 냈고, 비교적 온건한 노선의 최현배, 이희승 등은 남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와중에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언어’보다 ‘글자’의 문제로 자신의 영역을 축소시킨 전략적인 미숙함을 내보였다. 북에서는 ‘조선어’에서 ‘언어’로 확장한 모습과 비견되는 일이다.
  남과 북으로 흩어진 옛 조선어학회 구성원들은 각자 자리 잡은 현장에서, 꿈꾸어 오던 사전을 편찬했다. 전쟁 중에 한글학회의 사전 원고가 북에 탈취당할 뻔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역사적인 흐름을 본다면 북의 입장은 탈취가 아니라 자신들도 공들여 만든 원고를(적어도 일부는) 뒤늦게 되찾아 오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남에서는 1947년부터 시작하여 1957년까지 모두 여섯 권으로, 북에서는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역시 모두 여섯 권으로 출간을 했다. 올림말 수도 서로 비슷해서(남은 16만 남짓, 북은 18만 남짓) 당시의 양측에서 파악하고 있는 공적인 어휘의 양은 많은 차이가 없었다.
    

  3. 냉전 시기와 그 이후

  전쟁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는 둘째로 치더라도 언어 분야에서 입은 손실도 적지 않다. 우선 훌륭한 기량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손상도 적지 않았다. 적대적인 진영에서 즐겨 사용하는 어휘도 함께 금기시된 것이다. 남쪽 사회에서 ‘동무, 인민, 주석’ 등의 어휘는 매우 이질적인 어휘 대접을 받았고, 북에서도 ‘자유, 인도주의, 아가씨’ 등은 비슷하게 다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민족’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은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닌 채 공유하게 되었다.
  냉전 시기에 뚜렷이 드러나는 사건은 북의 문화어 성립이다. 이것은 언어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정치적 사건이다. 당시의 남쪽은 자본주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면서 일본의 경제권에 귀속되어 가던 시점이었고, 이것이 사회 내부에 상당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북쪽은 소련과 중국 사이의 심각한 갈등으로 말미암아 독자 노선이 가장 유리한 상황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와 같은 국면은 우리 언어의 공유 부분을 더욱 줄어들게 하였다. 북은 이 시기를 ‘문화어’라는 구호로 치고나와 민족사의 정통성을 선점하려고 한 것이다. 남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70년대의 한글전용과 국어 순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70년대의 앞머리인 1972년 7월4일 발표된 7·4공동성명은 충격과 희망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한 정치 국면은 그러한 순진한 기분을 그리 오래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남과 북의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더니 드디어 쌍방은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길로 돌아서게 되었다. 남쪽은 북쪽 정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유신 헌법을 선포하였고, 북쪽은 이후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하게 된다. 이 두 헌법은 양쪽 사회를 훨씬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남쪽의 헌법은 진보 사상에 대한 동조와 정부에 대한 반대 의견을 사실상 차이 없는 범죄로 동일시함으로써 북쪽에 대한 어떤 종류의 접근도 봉쇄해 버렸다. 또 북쪽의 헌법은 수도를 서울이 아닌 평양으로 규정함으로써, 비록 전쟁을 피하는 조항으로서의 의미는 크지만, 분단 상황을 법리적으로 뒷받침한 셈이었다.
  해빙과 결빙을 오락가락하던 냉전의 시기는 남과 북의 언어 문제에 대한 관심도 오랫동안 동면 상태에 빠뜨렸다. 그러한 동면 상태는 1980년대 끝 무렵 남과 북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면서 서서히 깨어나게 되었다. 유엔 동시 가입은 사실 남과 북이 별개의 국가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스스로 고백하는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분단을 스스로 공인할 뿐만 아니라 재통일 노력이 자칫 침략적 행위로 비화될 수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식 논리를 뛰어넘어 분단이 공식적으로 서로 수용된 순간부터 남과 북의 교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남과 북의 비공식적인 접촉 기회는 유엔 동시 가입이 결정적인 계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을 통해 양쪽 정치권이 비교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바탕에서 1989년부터 본격화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이를 기회로 삼은 남쪽 정부의 이른바 북방정책의 효과도 컸다. 북방정책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와 교류가 시작되었고. 그곳의 교포들을 통해 북쪽과 다양한 공식, 비공식 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과거의 통로였던 일본까지 포함한다면 접촉 통로의 다변화는 다양한 정보를 남쪽 사회에 퍼뜨렸다. 90년대 초기에 북쪽에서 출판된 많은 국어학 관계 서적의 영인본들은 남쪽 사회의 갈증을 풀어 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지나간 50년 동안 북의 전문가들이 어떠한 활동을 해 왔는지 그 전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중국에 있는 동포 학자들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포 학자들은 북의 언어 연구 자료를 남쪽에 제공하는 초보적인 기능에서 시작하여 남과 북의 만남을 주선해 주고, 아무리 정치적으로 경색된 국면이라 할지라도 개별 만남에서의 우호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연변대학이 중요한 연결고리의 기능을 했으나 나중에는 북경대학, 북경 외국어 대학 등 중국의 중심지에서의 역할도 매우 활발해졌다. 아무래도 남과 북이 물리적으로 만나기 좋은 조건은 수도인 베이징이나 동북지구의 선양이 여러모로 편리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포 지식인들의 도움은 훗날에도 오래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4. 국립국어원

  20세기 마지막 10년은 많은 정치적 격변이 남과 북의 화해와 공동 사업을 꿈꾸던 사람들을 종종 들뜨게도 했고 좌절도 많이 하게 했다. 그만큼 가능성과 위험성이 공존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의 만남도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했고, 주로 중국 동포들의 도움을 얻어 그들이 양측을 초청하여 비정치적인 분위기에서 언어 및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주제 역시 언어 일반 문제 혹은 정보 통신과 관련된 부문이 비교적 전문화된 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장 큰 소득은 어떤 이론적인 결론이 아니라, “대화가 서로 가능하다.”라는 희망이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동안 계속 중국 연길에서 열린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에 국어정보학회가 참가하였고 2001년에 다시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역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기 위한 노력은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회성 학술 행사에 그친 경우가 많았고 조직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만남을 계속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국립국어원(2004년 11월 이전에는 국립국어연구원이라고 했음.)은 정부 소속 기관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불가능했지만 국내 학술 대회에 중국의 동포 학자들을 불러 남과 북의 여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여는 데에 함께 한 정도만으로도 만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국어원은 1996년에 언어 규범 문제로 중국 장춘의 회의에서 북쪽의 학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성과가 있었다면 우리가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지는 ‘언어 규범’ 문제가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일회성 만남 이후 2001년에 다시 중국 베이징에서 학술회의 행사를 같이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의 연속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립국어원은 과거에도 북의 국어 관련 연구 보고서를 여러 차례 발간해 왔으나 그동안 북쪽과 직접 접촉하여 보고서를 발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2001년과 2003년 북의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와 접촉하여 학술회의를 하면서 서로 관련 있는 연구를 함께 진행하여 보고서를 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 계기는 2001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 학술 대회에서 북의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와 만나게 된 일이다. 이 자리에서 국립국어원과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는 향후 학술 자료 교환을 바탕으로 하여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해 나가기로 하고 국어 순화, 말뭉치, 기초 어휘 자료, 방언 등의 분야에 대해서 함께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를 통해 서로 상대방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 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 서로의 경험 등을 정기적으로 나눌 기회를 마련한 것은 국립국어원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서나 남과 북의 언어 정책을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계기와 자극이 될 것이다.
  2002년부터 국립국어원에서는 2001년 학술 대회에서 협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2002년에는 ‘남북 언어 순화 자료집 1’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2002년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국제 학술 대회를 열지는 못하였고 2003년 11월에 베이징에서 두 번째 국제 학술 대회를 열게 되었다. 2003년에 열린 2차 학술 대회에서는 국어 순화와 말뭉치 및 방언에 관련된 토론을 벌였고 그 자리에서 다시 말뭉치와 방언을 중심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로 하였다. 특히 방언의 경우 남과 북에서 2004년부터 한반도를 지역별로 나누어 방언 조사를 벌이는 작업을 시작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 방언 조사에 대한 공동 작업은 우리의 학문사에서나 문화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일이다. 방언을 조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희귀한 언어 형태를 수집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단일 언어가 어떠한 지역적 분포를 보여 주는가 하는 문제는 그 언어의 지리적 사용 범위를 객관적으로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따라서 해당 언어로 광범위한 의사소통 범위를 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국가 간에 예민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단일어가 어떠한 체계의 민족어로 발전하였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독일의 그림 형제가 동화 수집과 함께 방언 조사를 한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당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어 사용 지역을 명확히 보여 주며 독일 통일의 미래를 위한 밑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데에 대단한 큰 가치를 지닌다.
  역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응당 한번 전면적인 방언 조사를 시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 구조가 지리적으로 어떻게 분포되었는지를 살펴 확실한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민족 국가 건설에 나섰어야 한다. 또 그것이 앞으로 건설될 민족 국가의 영토 개념과 일치하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그와 비슷한 역할을 시도했던 사람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한 사람뿐이 아닌가 한다. 실학파 학자들 가운데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방언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은 자산어보를 지은 정약전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가 그러한 사업을 방치하고 있는 동안 민족 국가 건설은 실패하고, 따라서 자기완결적인 민족어 형성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져 버렸다는 것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의 방언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 학자의 손에 의해서 첫 번째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사실이다. 1914년, 1924년의 오구라 신페이의 조사 연구, 1940년의 고노 로쿠로의 업적이 바로 그것이다. 또 외지인의 눈으로 본 우리의 방언은 앞에서 언급한 우리 언어의 생태 조사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가?” 하는 문제와 “그래서 어떤 방언권으로 나뉘는가?”, 또 “어휘 하나하나의 통시적 내력이 어떠한가?” 하는 것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우리의 자기발전적 노력의 결실이었다면 연구의 방향 역시 어디까지 변종이 널리 분포하는가가 더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쉬운 첫 단추는 우리의 방언 연구가 극히 실증주의적인 단편적 지식의 축적에만 머무르고 언어학 전반에 걸친 학문적 메시지를 던져 주지 못해 왔다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광복 이후에도 적잖은 방언 연구가 있었지만 대부분 연구자의 연고지에서 사용하는 방언에 대한 관심 정도였고, 전면적인 조사는 1980년 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의 대규모 방언 조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조사야말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사실상 맨 처음 시행하는 전면 조사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조사 방법 자체가 이미 일제 시대의 그것을 훨씬 압도하는 방법론적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도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약점은 비켜 갈 수 없었다. 바로 분단이라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결실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사용 지역의 반쪽밖에 안 되는 불가피한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2004년에 본격적으로 첫 발을 내딛는 남과 북의 지역어 조사는 의미심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근대화 이후 100여 년 동안을 방치해 놓았던 문자 그대로의 전면적인 방언 조사를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동원되는 인력과 예산의 규모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지난날에 비해 훨씬 더 진보된 방법론을 활용하여 기자재의 디지털화와 전사 결과와 음성 자료를 일치시켜 시연해 내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등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순수 언어 연구뿐만이 아니라 언어 정보화 분야에도 힘을 쏟아 중국에 진출해 있는 북쪽의 정보 통신 기업과도 교류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립국어원은 국내에서 처리하기 불편한 일부 소프트웨어를 북쪽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해결할 수 있었다. 북쪽 기업과의 교류를 가지면서 얻게 된 것은 북의 전문가들의 정보 통신 관계 기술이 상당히 높았고, 해외의 기술 진보 상황을 대단히 제대로 점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대북관계 사업은 그 사업 내용의 의미와 성과를 통하여 평가를 해야 할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실리보다는 미래 가치를 중심으로 평가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또 그동안의 접촉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북쪽은 우리 남쪽보다도 ‘인간적 믿음과 유대’에 대단히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친분관계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상대방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기까지는 답답하리만큼 시간을 끌다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고 보게 되면 일의 진행이 눈에 띄게 빨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은 앞으로 남과 북의 공동 사업을 꾸리는 작업에 각별히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2004년까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립국어원은 1996년도에 남북 국제 학술 대회를 개최하여 북한 학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으나 남북 양측에게 모두 부담이 되는 어문 규범 문제를 주제로 삼는 바람에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고 그 후로 학술 대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는 합의가 어려운 사항을 논의하기보다는 남북 양측에 모두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항을 논의하면서 북한 학자들과 접촉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2001년 12월 국립국어원은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의 동포 교수의 주선으로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김일성 종합대학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국제 학술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남과 북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국어 순화를 주제로 하면서 향후 정기적으로 학술 대회를 열고 서로에게 부족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이 대회 이후 2002년부터는 국제 고려학회 아시아분회(베이징대학교의 조선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로 축적한 국어 순화 자료, 말뭉치 자료, 방언 자료, 기초 어휘 자료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2년도에는 일정 조정이 잘 안 되어 2001년도에 가졌던 남북 국제 학술 대회의 맥을 잇는 2차 학술 대회를 열지 못하였다. 2002년 8월에 베이징에서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 측 인사를 만났을 때 2003년 상반기에 학술 대회를 개최해 보자는 정도의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2003년 중국 전역에 사스가 퍼지는 바람에 회의가 계속 연기되다가 2003년 11월에서야 베이징에서 학술 대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국립국어원은 북한의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와 많은 양의 말뭉치 자료와 사전 입력 자료를 교환하였고 2004년도에 방언 조사 사업을 시작하여 자료 교환을 하자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양측과 중국 측은 2004년 6월 말에 베이징에서 방언과 전문 용어에 관한 국제 학술 대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2004년 2월과 6월에 중국 측에서 이를 위한 실무적인 예비 작업을 하였다.
  이번 2004년에 열린 학술 대회는 2001년에 열렸던 제1차 국제 학술 대회와 2003년 11월에 열렸던 제2차 국제 학술 대회의 뒤를 잇는 제3차 국제 학술 대회이고 실질적으로 남북이 본격적으로 방언 조사 사업과 용어 통일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학술 대회이다. 이 학술 대회에서는 향후 국립국어원과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말뭉치, 방언 사업에 대한 세부 협의와 추진 방향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2004년도 국제 학술 대회에서 남과 북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논의하였다.
  첫째로 한반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방언 조사를 펼침으로써 우리 언어 속의 고유어 체계의 보존과 확장을 위한 기본 자료를 확보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유어 체계를 바탕으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어휘 구성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을 닦게 되었다.
  둘째로 남쪽과 북쪽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언 자료의 수집과 정리하여 앞으로 사전 편찬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휘 요소가 창작물이나 교육적 언어 자료에 더욱 풍부하게 드러날 수 있게 하자는 뜻을 같이하였다.
  셋째로 남과 북의 국어 관련 학술 자료들을 교환하여 서로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한다. 특히 말뭉치 구축 및 남북 언어 정보 처리 관련 사항에 대해서 긴밀하게 협의하기로 하였다.
  넷째,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남북 언어 교류의 기본 틀을 마련하며 현재의 방언 조사를 꾸준히 추진하기 위하여 협의회 같은 것을 구성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호 협력을 위하여 우리 국립국어원은 향후 다음의 다섯 가지의 사업을 남북 협력이라는 틀 안에서 지속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① 북한에서 보유하고 있는 최신 언어 자료의 수집
  ② 지속적인 남북 언어 교류를 통한 남북 언어 통일 정책의 기반 마련
  ③ 분단 이후 조사를 하지 못한 북쪽 지역의 방언 자료 수집 및 정리
  ④ 남북 언어 자료(사전 자료, 말뭉치 등) 교환을 위한 표준 형식의 마련
  ⑤ 남북 언어 통일을 위한 전문 용어 통일 사업의 추진
    

  6. 무엇을 해야 할까?

  멀리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부터, 가까이는 최근의 남북 협력 사업의 개관까지 훑어 보면서 앞으로 전개되어 나갈 양측 관계의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의 구체적인 과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서로의 신뢰 구축 문제이다. 이미 지나간 몇 해 동안의 노력으로 과거의 불신과 거리감은 많이 해소되었으나 책임 부서의 담당자부터 주변의 협력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유대감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더구나 서로 담당자들이 교체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이 아닌 구성원 전반을 아우르는 도타운 분위기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신뢰의 구축에는 단순히 열린 마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적응이 실제로는 더 중요하다. 친절하고 다정한 몇 마디가 자동적으로 신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이 글의 앞부분부터 여기까지 흘러 온 양 진영의 발자취와 방향성, 그리고 그간의 고민과 문제의식 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없이는 사교는 가능할지언정 공동 사업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직은 충분한 상태가 아니지만 서로 가지고 있는 방향 설정의 공유 면을 확대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공동 사업의 경험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이것도 교집합 부분이 상당히 넓어진 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위적인 협력 사업에서 실존적인 협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기본 틀이 형성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을 언급한다면 제삼의 협력자의 중요성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남과 북의 문제는 뜻하지 않은 정치적, 외교적 불똥이 일의 진척을 방해하거나 좌초시킬 수 있다. 따라서 종종 연락 통로가 갑자기 끊기는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로도 제삼의 협력자가 항상 함께할 필요가 있다. 국립국어원의 사업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동포 학자들이 대단히 우호적인 다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 큰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단순히 중간 연락책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매우 오랫동안 북쪽 인사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더 그 특유의 대화 방식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아직 서툴다 싶을 때는 동포 학자들의 조력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일의 성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경우가 많다.
  앞으로 남과 북의 관계가 더 성숙하게 되면 더욱더 다양한 접촉 통로와 방식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제 고려학회와 같은 조직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고려학회는 일본 측 인사도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방식으로 접촉 면을 늘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충분히 무르익은 협력을 해 오지는 못했지만 언어 문제뿐만 아니라 그 인접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정보 통신 기술, 문학과 역사 등의 영역과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또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이런 개별 영역에서 일구어 낸 각종 경험과 만남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는 것은 더욱 세련되고 성숙한 남북 협력의 흐름을 넓혀 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비록 인접 분야라고 할 수는 없으나 스포츠 분야도 어느 분야보다 오랫동안 대북 접촉을 해 온 경험이 있다. 우리의 사업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 전문용어 문제 등에는 이런 색다른 분야와의 공조도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국어 교사들의 모임도 활발한 남북 협력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나칠 정도로 학자 중심으로 흘러가는 국립국어원의 사업에 앞으로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과 접목될 수 있다면 더욱더 넓은 시각에서의 전망과 또 그에 따른 결실이 가능할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흘러온 사업의 윤곽을 바탕으로 2004년의 구체적인 활동 하나하나를 검토해 보면 앞으로 국어학 및 국어 운동 분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또 어떠한 협력의 여지가 더 남아 있는지 파악이 더 쉽게 되리라고 본다.
  지나간 100년에 대한 아쉬움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상에 젖게 하지만 각성한 이들의 새로운 발걸음은 지난 세월을 ‘잃어 버린 100년’이 아니라 ‘단련과 교훈의 100년’으로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에 되갚아야 할 빚이자 유산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