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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쓰인 우리말
안인희 / 번역가

  1. 들어가는 말

  번역을 하는 것과 번역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하나는 언어 매체를 넘나드는 내용과 표현을 문제로 삼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매체인 언어 자체를, 그것도 둘 이상의 언어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은 번역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일을 별로 하지 않고, 대개 번역의 경험이 적은 직업 학자들이 그 일을 떠맡는다. 학자들이 번역을 논하면 이상적인 이론을 펼칠 수는 있으나 실제 번역을 위해 쓸모가 있는 실천적인 설득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직업 번역가로 일하다가 느닷없이 이런 글쓰기를 떠맡았기에 이중의 한계를 느낀다. 실천도 이론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면서 번역에 쓰인 우리말의 움직임을 다룬다는, 실천과 이론이 모두 필요한 주제의 글쓰기를 떠맡고 나섰으니 말이다. 이럴 때는 한 가지 전략만이 가능한 것 같다. 자기가 아는 내용을 잘 정리해서 가능한 한 객관적인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때 문제로 느끼던 것들의 실체도 드러낼 수 있고, 또 나름대로 찾아낸 몇 가지 해결책과 문제점들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이런 전략에 따라 쓰인 글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번역 책 전반에 걸친 객관적인 관찰이라 부르기에는 못 미치는 구석이 많다. 그저 자기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의 번역가가 관찰한 우리말의 움직임과 문제점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2004년도 국어 연감에 들어갈 글이기에 2004년도에 출판된 책들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야 옳겠으나, 번역에 쓰인 우리말이라는 이런 주제의 관찰이 전에 별로 없었기도 하고 그래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해마다 출판되는 번역 책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1) 이것들을 일일이 살펴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주로 내가 함께 일하는 몇몇 중요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을 중심으로 삼고 나머지 중요하지 않은 책들은 그야말로 눈에 걸리는 대로 이용하였다. 그러니까 이것이 글쓴이의 주관적 관점에 따른 글임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나 자신의 번역 작업에 나타난 변화를 출판시장 전체의 변화라는 맥락과 연결하여 짚은 내용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도 인정해야겠다. 나는 번역가로서 출판시장에서 죽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을 개인적으로 최고의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은 의미 있는 관찰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번역의 문제는 번역된 책만으로는 다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에 번역의 문제도 함께 있다. 예를 들면 영화, 만화영화, 게임, 뉴스, 잡지, 각종 비평, 요리, 수많은 제품의 사용설명서, 심지어 텔레비전 연속극에 이르기까지 말이 들어간 일치고 번역의 문제가 하나도 안 들어 있는 영역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많은 지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탓에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처럼 지구 전체가 점점 더 하나가 되고 있는 시대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글은 번역 책들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관찰대상이 된 책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대신 주로 내가 함께 일하는 출판사 이름만 뒤에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2000년 이후에 각 출판사들이 내놓은 책들의 목록을 찾아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개별적인 책의 제목과 번역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은 이 글이 그들 하나하나를 구체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번역에 나타난 우리말의 전체적인 모습과 거기서 느낀 문제점을 주관적으로나마 한번 짚어 보려는 의도를 담은 글이다.
  

  2. 번역 책이 나오기까지

  번역 책이 나오기까지는 몇 개의 과정을 거친다. 번역 책에 쓰인 우리말은 원칙적·기본적으로 번역가의 것이지만 번역과 출판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제약이나 뜻밖의 조건들이 발생한다. 그것부터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2.1. 원서의 특성

  먼저, 원서 자체가 가진 특징들이다. 어떤 책이든 출판된 것은 예상되는 독자층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번역되기 이전의 원서는 발간연도와 장소와 주제에 따라 우리와 전혀 다른, 때로는 우리가 짐작하기도 어려운 독자층을 겨냥한 것이다. 이것이 다시 공간과 언어를 뛰어넘는 것은 물론 시간도 뛰어넘어 번역의 대상으로 선택되어 한국말 번역판으로 출판되는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예컨대 2004년에 출판된 책의 원서는 수천 년 전에 쓰인 것부터 그야말로 최근의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단순히 우리말로만 짚어 보기 어려운 생각이나 환경의 근본적인 차이들이 처음부터 속에 담겨 있다. 원서가 쓰인 시간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그 장르 또한 대단히 다양하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 쓰인 것만 따져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플라톤의 대화, 기본적으로 관찰에 바탕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성과들은 제각기 그에 알맞은 장르와 언어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전통이나 우리말로는 그것들을 제대로 품어 안을 운율은 말할 것도 없고 장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중요한 고전들을 무시하고 지내는 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새로운 것들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 과학 분야의 낡은 또는 새로운 개념들이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도 전에 외래어 개념으로 그대로 굳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옮긴다 하더라도 일본식 한자말을 그대로 우리 식으로 읽어서 들여오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따금 이런 일본식 한자말이 우리에게 풍기는 낯섦은 서양말의 낯섦에 못지않다.
  동서양의 고전에 쓰인 언어가 특별히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 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 읽을 수 있게 만들어진, 정본(正本)이라고 할 만한 고전의 번역이 대부분 없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의 번역, 또는 지적 인프라에서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이고 보면 그렇게 쉽게 잊고 지낼 일은 아니다. 고전 번역이 없는 언어란 대체 어떤 언어일까? 그에 따른 구체적인 문제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복잡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 번역 시장에 등장하는 책들은 대부분 고전이 아닌 것들이다. 그래서 때로 이상한 문제들도 나타난다. 원서 자체가 품질이 아주 뛰어나지 않은 것들도 요즘은 많이 번역되고 있다. 경제 문제 또는 아예 돈벌이를 다루거나, 여러 가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중적인 책들이다. 이런 책들 일부는 원서의 언어가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심할 경우 인쇄 오류도 나타난다. 번역가에게 정직함을 요구하자면 원문이 뛰어나지 않은 것도 있는 그대로 옮겨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정직성과는 관계가 없이 돈벌이에 열중하는 출판사들이 이런 원서를 만나면 원서가 가진 몇 가지 속성에 기대어 텍스트 일부를 멋대로 새로 지어내다시피 하는 것도 아주 드문 일만은 아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런 책일수록 우리말로는 술술 잘 읽힌다.
  그러니까 원서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책일 때는 번역의 무게가 만만치 않고, 반대로 원서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닐 때는 작가가 누군지 모르는 이상한 합성 괴물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책들은 원문의 문체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우리말로 정확하게 잘 읽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2. 우리말과 학문 전통, 그리고 도구로서의 언어

  대부분의 고전은 우리의 것과는 시스템이 전혀 다른 운율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이것의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시피 한데도, 문학이나 철학처럼 그 언어 자체가 주제의 한 부분을 이루는 분야의 1차 문헌 서적들은 우리말 번역에서도 원문의 문체나 낱말의 뉘앙스를 최대한으로 살려내야만 한다.
  서양의 고전 작품들을 원문으로 읽어본 사람들은 그 언어의 위대함 앞에서 압도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사유가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면서도 전체의 맥락을 분명히 붙잡고 있는 언어의 정교함과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함 앞에서 때로는 경탄을 넘어 넋을 놓게 된다. 우리말로는 이것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도 그렇게 넋을 놓는 이유의 일부이다. 어떤 말로 된 것이든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은 그 언어가 가진 온갖 차원의 표현 가능성을 극단까지 추구한 작품들이다. 곧, 그 언어의 온갖 표현의 가능성을, 그것이 쓰일 당시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안에 실현해 놓은 것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도 교육열이 높고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아주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곧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 역사의 길이에 비해 우리말로 된 학문과 문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아주 짧다는 사실이다. 우리 조상 중에 위대한 학자들은 대개 한문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사용한 한문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는 학문과 문학의 언어에 대해서는 조상에게 크게 기댈 것이 없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말을 제대로 다듬어서 위대한 사상과 복잡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국제적인 언어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 분야에서 이런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상 중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다거나,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잘 쓰기만 하면 그것으로 훌륭하고 완벽한 우리말이 된다거나 하는 애국적인 생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음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말 학문이나 문학의 전통이 짧다면 모든 문제점을 한꺼번에 건너뛰어 극복할 수는 없고, 차례를 밟아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언어는 내용을 담는 도구이면서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지적인 환경이다. 우리에게는 한국말이 그것이다. 지적인 환경은 놓아두고라도, 언어의 도구적 특성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통통한 물고기 한 마리를 얻는 것보다 낚싯대를 갖고 그 사용법을 제대로 익히는 쪽이 훨씬 더 낫다. 제대로 된 내용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도구가 정교하고 간편하고 그 사용법이 쉬워야 한다. 도구가 아무리 중요해도 결국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된 학문의 전통이 짧다는 것은 우리말을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의 매체로 사용한 경험이 짧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말은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의 매체로서 -즉, 도구로서- 이미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듬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배들은 불행히도 일제 때 국한문 혼용을 선택하였다. 나라를 잃고 마음이 급했던 당시로서는 아마 그것이 빠른 길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한자말이 넘쳐 나고 있다. 학술 개념은 반드시 한자말로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아니 거의 모두가 그렇다. 그러면서 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말거나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가 사용자들 사이에서 심하게 분리되는 혼란스런 현상이 생겼다. 다른 나라에서도 학자들이 쓰는 말은 어렵다고 둘러대고 넘어갈 수 없는 우리만의 심각한 분리현상이다. 이제는 그런 현상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급한 시점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과학의 내용과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효율성이 정말로 떨어진다. 이해의 속도가 한없이 느리고 성과가 적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한자말이나 외래어가 이해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때로는 방해하기 때문이다. 말을 도구로 본다면 우리는 형편없는 도구를 가진 셈이다.
  

    2.3. 번역가의 개입

  원서가 가진 특성이나 작가, 장르에 따라 번역에서의 중점이 조금씩 이동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나 철학의 고전작품들은 읽기에도 좋고 원문의 맛과 특성도 가능하면 많이 살려내야 한다. 운율을 지닌 말들 중에는 번역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외국말의 운율과 비슷한 것을 우리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도 우리 생각보다는 더 많다.2) 그에 반해 정보 전달이 목적인 글은 우리말로 내용이 정확하고 읽기에 편한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어떤 글이 되었든 원문의 뜻과 뉘앙스를 완벽하게 살리고, 저자나 작가의 문체와 문장의 생김새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우리말 문법도 반듯하고, 번역문이 아닌 것처럼 매끄럽게 읽혀야 한다는 번역의 이상(理想)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작업의 현실에서는 한 텍스트에서도 이런 여러 항목이 서로 부딪쳐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고, 번역가는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덕목들을 원서의 특성에 따라 조절하거나 그 수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번역은 성실함과 정직함이라는 기본적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 번역가에게 낱말과 문장에 대한 남다른 감각까지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일한 텍스트가 번역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글처럼 읽히는 까닭은 바로 언어에 대한 번역가의 감각과 재능이 개입하는 이 부분에 주로 들어 있다.
  따라서 한 번역가가 옮긴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골라 비교하면 우리말로 일정한 문체의 특성을 보인다. 이것은 바로 번역가 자신의 문체의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번역된 책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원래 저자의 글이지만, 우리말만 따지자면 중간에 매개자로 등장하는 번역가의 글이기도 하다. 이것은 많은 독자에게는 매우 불만스럽게 들리는 말이겠으나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고 제약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통해 우리말의 다양성을 늘리는 통로가 될 가능성이기도 하다.
  

    2.4. 우리나라 출판 시장

  번역된 책들에는 원서의 특성과 번역가의 개성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 시장의 특성도 반영된다. 국책사업으로 국가의 지원이나 아니면 민간의 지원을 받는 일부 서적들을 빼면 보통은 출판사들이 출판할 책들을 결정한다. 민간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이른바 문화 사업은 이념논쟁이 한창 불붙던 80년대나 90년대에 비해 오히려 수가 줄었다.
  지금은 질이 그다지 나쁘지 않으면서 장사가 잘될 책들이 주로 선택된다. 고전은 그만두고 조금이라도 오래된 각 분야의 기본적인 책들도 시장에서의 판매 가능성이 크지 않으면 잘 선택되지 않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 거의 절정에 이른 돈 중심의 실용적 생각은 서적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이른바 '경제 경영서'라고 불리는 돈벌이 방법과 처세술 책들이 번역시장에서도 주류를 이룬다. 그 밖에 요리, 건강, 운동, 여행 등 온갖 실용적인 내용의 가벼운 읽을거리들도 쏟아져 나온다. 이런 책들을 놓고 굳이 번역이나 우리말의 질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번역을 논할 때 독자에게 공급되는 대부분의 책이 시장에 의존하는 출판사의 판단에 따라 선택된다는 현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번역이 끝나기 전에는 많은 경우 출판사에서도 원서의 질에 대한 판단을 아주 분명하게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동일한 편집자들이 거의 모든 책의 편집을 맡는다. 출판과정에서 편집자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첫 독자로서 글을 전체적으로 읽고, 기본적인 교정과 교열을 맡고, 그림과 글을 배치하는 레이아웃과 표지에 이르기까지 책의 최종적인 전체 모습이 편집자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번역가의 작업은 편집자의 손에서 교정과 교열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뜻이다. 능력 있는 편집자들은 번역가의 작업을 우리말 독자들이 읽기 좋도록 한 단계 높이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만 모든 편집자들이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특히 서양말에서 우리말로 들어오는 번역 원고는 문장 안에서 낱말이 오는 차례가 달라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여러 이질적인 요소 일부를 편집자가 조정해야 한다. 주로 낱말의 차례를 바꾸고 토씨를 고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서투른 편집자들은 이것은 놓아두고 번역가가 선택한 낱말에 섣불리 손을 댄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우리 출판계에서 아주 오래되고 유명한 문제의 하나이다. 번역 책의 우리말이 기본적으로 번역가의 것이지만, 또한 편집자의 책임도 조금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 밖에도 번역된 원고가 당장 나오지 않고 출판사에서 여러 해나 묵었다가 책으로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3. 뜻의 단위들과 번역의 과정

    3.1. 뜻의 단위들

  소리로 이루어진 낱말에서 출발하여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의미의 단위들을 들자면 다음과 같이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리 - 낱말 - 문장 - 단락 - 장(章) - 책 전체
  소리-낱말-문장까지가 언어학의 대상이다. 곧, 음운론, 형태론, 문장론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소리가 모여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문장이 되는데, 이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낱말에 쏠려 있다. 낱말에 대한 관심이 문장이라는 더 큰 단위로 연결되지 않고 낱낱이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더욱이 저마다 새로운 한자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두 글자로 된 한자말을 조합하다 보면 문장을 만드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기는 모양이다.
  번역이나 글쓰기나 일상생활에서 말과 글의 기본단위는 낱말과 문장이다. 문장을 바로 쓰기 위해서는 제대로 만들어진 낱말을 올바르게 써야만 한다. 전체 문장과 단락의 의미까지 생각하면서 각각의 낱말을 그에 맞게 써야 한다. 어떤 언어든지 낱말을 바르게 변화시키고, 다시 그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여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문법의 규칙들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문법은 각각의 말에 따라 다르다. 중국말과 우리말이 다르고, 또 일본말과 영어가 제각기 다르다. 문법이 다른 만큼 낱말과 문장을 만드는 규칙도 서로 다르다.
  

    3.2. 번역의 과정

  번역은 한 언어(처음말)로 쓰인 내용을 다른 언어(나중말)로 옮기는 일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칼질 - 낱말번역 - 바느질3)
  '칼질'은 먼저 원서의 문장을 분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문법을 바탕으로 문장을 분석하여 낱말의 단위로 가르고 그로써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정확한 뜻을 찾아낸다. 처음말에서 나중말로 옮겨가는 번역작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하나로 붙잡아 주는 공통의 요소는 문장의 의미다. [소쉬르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번역의 과정이란 시니피앙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의미, 곧 시니피에만 동일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의미는 양쪽 말의 문장과 단락의 틀 안에서 동일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 '바느질'은 칼질과는 반대로, 찾아낸 의미를 나중말의 문법에 맞는 문장으로 옮겨 담는 작업이다.
  칼질과 바느질은 문법에 따른 분석 및 종합의 작업이다. 이것은 정밀한 문법 내용을 바탕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까지 기계화할 수 있는 작업이다. 오늘날의 문서 번역기들은 바로 이 부분을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이다.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물론 양쪽 말의 정밀한 비교 문법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칼질과 바느질을 제대로 한다. 그리고 처음말의 문법 특성과 나중말의 문법 특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그 자리에서 당장 속셈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특히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어림도 없다. 이것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종이 위에 연필로 쓰면서 꼼꼼히 양쪽 문법을 계산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얻게 되는 정밀한 기술이다. 정밀한 기술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다시 종이 위에서 계산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아무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번역에 기술의 측면이 있다면 칼질과 바느질하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처음말의 문법을 올바르게 분석하여 뜻을 찾아내고 그것을 나중말로 문법에 맞게 다시 조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런 문법 작업의 한가운데서 뜻을 옮겨 담는 일은 낱말의 어휘 부분이 떠맡는다. 그러니까 번역은 문법과 어휘가 다른 두 언어를 놓고, 문법의 부분과 어휘의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문법은 언어의 전체적, 추상적인 측면이요 어휘는 세부적, 구체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번역의 문법적인 부분은 계산화될 수가 있지만, 어휘적인 부분은 기계적인 계산이 불가능하고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잘될 수도 못될 수도 있다."4)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은 문법 규칙이 전혀 다른 처음말과 나중말을 놓고 단순히 낱말을 일대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낱말이라고 얼른 말하지만 많은 낱말이 문법과 어휘의 부분을 함께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말의 낱말 하나가 그냥 자동적으로 나중말의 낱말 하나로 넘어갈 수는 없다. 낱말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문법 기능들을 일일이 살피고 따지고 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번역에서 처음말이 되는 외국말은 문법을 그런대로 자세히 배우지만, 나중말인 우리말은 문법 기능을 일일이 살펴서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제대로 익히지 않고도 공짜로 잘할 수 있다고 여기니 기계처럼 정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문법 계산이 틀리게 된다.
  낱말이란 문장 안에서의 낱말이고 낱말과 문장을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어쨌든 문법 부분을 기계화할 수 있다면, 번역가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은 낱말의 어휘 부분을 찾아내는 일이다. 찾는 말이 없으면 있는 말을 두드려 붙여 새 말을 만들어야 하고,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것만 원문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번역할 때 낱말을 기계적으로 일대일로 바꿔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휘만 따져도 영어나 도이치말 같은 서양의 말은 우리말과는 각각의 낱말이 가리키는 의미영역, 곧 낱말밭(Wortfeld)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말로 "나는 누이가 하나 있다."라는 영어의 낱말로만 보면 "나는 누이를 하나 갖고 있다."가 된다. '있다'와 '가지다'라는 술어가 미묘한 차이와 일치를 보인다. 이런 것은 아주 흔한 일인데,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이런 영어 문장은 우리말 문장의 표현방식에 맞게 옮겨져야 한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처럼 우리말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말들도 마찬가지다. 말에 따라 낱말밭과 문법이 서로 다르니 번역의 결과는 언제나 나중말의 반듯한 문장으로 나타나야 한다.
  외국말에 대한 관심 탓인지 아주 많은 사람이 번역에 관심이 있다. 스스로 책을 많이 읽지도 않으면서 번역을 하겠노라 덤비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한국말로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번역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가진 약간의 외국말 문법 지식을 바탕으로 사전을 찾아 그냥 낱말들을 일대일로 바꿔치기 해주면 번역을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그와 비슷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외국말을 공부한 사람치고 남이 해 놓은 번역에 대해 한두 마디 의견을 갖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출판된 번역 책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비판이 낱말을 일대일로 대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번역된 책이나 텍스트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이미 강조했듯이 우리말 문장의 표현이 올바르냐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옳다. 우리말로 읽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번역이라면 번역한 사람의 취미활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책이란 언제나 읽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이나 텍스트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위에 늘어놓은 뜻의 단위를 뒤에서부터 거꾸로 헤아려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맨 먼저 책 전체와 장(章) 단위의 주제나 메시지가 틀리지 않게 올바르게 전달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단락들의 의미가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맞는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단락 안에서, 그리고 단락들의 연결이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각각의 문장과 낱말들을 따져 볼 수가 있다.
  물론 주요 개념을 이루는 낱말들이 잘못 옮겨진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주요 개념이 완전히 빗나갔을 때는 단락이나 장 전체의 논리적 맥락이 올바르게 전달될 수가 없다. 그래서 번역에 대한 진지한 비판은 결국 다시 낱말과 문장의 차원에서 벌어지게 된다. 비판의 대상이 될 정도의 책들은 그 앞의 조건들을 대부분 충족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번역에 쓰인 우리말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말과 글이 번역가의 언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시장의 흐름과 상관없이 홀로 상아탑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 책을 공급하는 사람이라면 시장에서 먹힐 만한 말과 문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번역 책에 사용된 우리말은 다시 사람들의 말과 글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번역 책에 나타나는 우리말의 변화는 다른 영역에서의 변화와 크게 차이가 없거나 아니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 저자의 책에 견주어 번역 책에 외래어나 외국어가 나올 가능성이 조금 더 크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전체적인 쓰임이나, 말에 나타나는 변화의 흐름을 아래 간단하게 제시하기로 한다.
  

    4.1. 소리번역 - 이른바 고유명사

  우리말 고을 이름 중에는 '무너미 고개', '박달고개', '삽다리' 등 일반명사로 된 것들이 꽤 많다. 그냥 땅의 특성을 가리키던 말이 고을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영어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 '랜즈 엔드(Land's End)', '케이프타운(Capetown)'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을 굳이 고유명사라 우기고 소리 번역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고유명사라 해도 뜻이 있는 낱말들로 이루어진 것들은 뜻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도이치말로는 '란데스엔데(Landesende)', '캅슈타트(Kapstadt)'가 된다. 우리말에도 아주 훌륭한 '땅끝'이라는 땅 이름이 있다. 여기 드러난 사고방식이 같으니 영어로도 그것을 그냥 가져다 쓰면 정말로 멋진 번역이 되지만, 이렇게 쉬운 것도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케이프타운은 복잡해진다.
  독일에 '슈바르츠발트(Schwarzbald)'라는 유명한 숲이 있다. '검은 숲'이다. 이것을 옛날에는 '흑림(黑林)'이라 옮기더니 지금은 '슈바르츠발트'라고 옮긴다. 고유명사라는 게 그 이유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옮긴이 주'라는 것을 붙여서 친절하게 뜻을 설명한다. 옛날에 한자 배우던 방법이다. 소리로는 '천'이라 읽고 뜻은 '하늘'이다. 소리 따로 뜻 따로 만들어 놓는 것이 아예 체질이 되었나?
  사람 이름이나 땅 이름 중에는 뜻을 옮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소리번역을 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뜻을 옮길 수 있는 것들은 옮기는 것이 옳다. 이때 한자말로 옮기면 옮기나 마나다. '슈바르츠발트'나 '흑림'이나 우리말로 얼른 뜻을 알기가 똑같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이 '흑림' 대신 '슈바르츠발트'가 되었다.
  요즘 원칙으로는 사람 이름과 땅 이름은 본래의 나라를 찾아 그 나라 말로 읽어 주어야 한다. 유럽 역사로 들어가면 이게 그리 간단치가 않다. 시대에 따라 국경도 말도 민족도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사람도 나라마다 자기들 방식으로 부르니 국적 찾아내기가 때로는 불가능하다. 외래어 표기에 관한 '법'이 버티고 있어서 아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법으로 묶어 놓은 것이 현장에서 수많은 말썽을 부린다. 더구나 '까미유 끌로델'에서 'ㄲ'을 쓸 수 없어서 '카미유 클로델'이, '죠르죠네'는 '조르조네'로 바뀐다. 대부분의 중요 출판사들은 '법'을 지키지만 이 법에 억지가 있어서 알거나 모르는 사이에 많은 혼란과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4.2. 소리번역 - 이른바 용어(用語)

  고유명사만이 아니라 이른바 용어라는 것들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소리번역해서 쓰는 일도 아주 흔하다. 마케팅, 스톡옵션, 게놈, 사이버스페이스, 쿼크, 캐터펄트, 에일러론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낱말들이 번역되지 않은 채 소리만 번역되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과학기술의 개념이 많아질수록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자말을 개념으로 삼아 쓰던 전통이 있는 한국 사람들이고 보니, 이제는 머지않아 한자말 대신 영어를, 아니면 한자말과 영어를 섞어서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우리말은 도로 토씨만 쓰게 될지도 모른다.
  용어야말로 외국어 낱말의 어휘 부분이다. 이 중 일부는 소리번역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부분은 뜻을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로 얼른 옮기기 어렵다고 이것들을 모조리 소리번역만 하여 쓰니 이것은 번역가와 인문학자와 언어학자들 모두가 제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탓이다. 우스운 일이지만 낱말의 뜻을 번역하지 않고 소리번역을 해 놓으면 아무도 별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러니까 뜻을 모르거나 번역이 서툴러서 소리번역만 해 놓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고, 오히려 뜻을 번역한 것들만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뜻을 번역해야 할 자리에 소리번역만 하는 것은 게으른 번역가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그대로 포기한 것이다. 번역 책을 비판하려고 할 때는 이렇게 당연히 해야 할 번역을 안 한 것을 먼저 짚고 들어가는 것이 옳다.5)
  용어는 모두 한자말로 옮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서, 뜻을 옮긴다고 해도 대개는 한자말로 옮긴다. 하지만, 한자말은 우리말로 착각이 들기는 해도 얼른 뜻을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다. 귀에 익은 한자말도 문장에 쓸 때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데 더구나 새로 만들어 낯선 한자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말로 한 번 더 뜻을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차피 뜻을 되새겨야 할 정도로 어려울 바에야 차라리 영어를 직접 쓰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6)
  우리말 용어를 쓰면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도 용어냐고 묻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쉬운 우리말을 용어로 쓰고, 글을 읽는 사람이 그것을 한번 받아들이기만 하면 용어 자체는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는다. 뜻이 보이는 우리말 용어는 기억하기도 쉽다. 읽는 사람은 한번 익힌 쉬운 용어를 되새기느라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용어를 이용하여 설명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텍스트가 펼치는 생각의 흐름을 함께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살펴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진짜 글 읽기 아닌가.
  

    4.3. 점점 더 잘못 쓰이는 한자말

  한자말은 소리만 듣고 얼른 뜻을 알 수가 없고 반드시 문장의 흐름에서 그 뜻을 다시 새겨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알더라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잘못 쓸 가능성도 훨씬 커진다. 한자말은 소리로 바로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이 아닌, 바탕이 중국말이기 때문이다. 한자말을 올바르게 쓰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고 있다. 한자말이 들어가면서 전체가 잘못 쓰인 문장은 신문이나 논문이나 배운 사람들이 써 놓은 글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고 그만큼 번역 책에서도 흔하다. 다만, 요즘 입말을 따라 번역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한자말을 덜 쓰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잘못 쓰일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잘못 쓰인 한자말을 찾아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잘못 쓰인 한자말은 낱말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문장 전체가 잘못된다.
"거물급 과학 인사들의 유명세는 수많은 청중과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했다."(?)
"아무개 박사의 자서전을 쓴 사람의 말을 빌리면"(?)
  

    4.4. 한자말 대신 많아지는 서양말 외래어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하였다.
  

    4.5. 문장의 길이가 짧아진다.

  이것은 서양말로 쓰인 원문 텍스트에서도 요즘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경향이다. 긴 문장은 문학적인 문체의 특성이 될 수는 있지만 정보를 지향하는 인터넷 시대에 꼭 맞는 형태는 아닌 모양이다. 우리말은 주어가 문장 앞쪽에 오고 동사 또는 술어가 문장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문장형태이기 때문에 문장이 아주 길어질 수가 없다. 특수한 만연체가 아니라면 마침표가 나오지 않더라도 각각의 문장은 길이가 짧다. 그에 반해 관계대명사절을 한없이 이어붙일 수 있는 서양말들에서는 우리말과는 다른 복잡한 방식으로 문장이 길어지는 형태들이 가능하다. 특히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전통적인 영어나 도이치말에 이런 특성이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최근에 나온 책일수록 이런 만연체의 멋을 버리고 간결한 쪽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원서의 경향에 더하여 우리말 번역가들이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문장을 더욱 간결하게 끊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최근의 번역 책은 읽기가 아주 편한 데 비해 원문의 생김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단 원문이 길어지면 번역가들이 중간에서 문장을 여럿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문장은 대체로 길이가 짧다. 이렇게 짧은 문장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긴 문장을 강요할 용감한 번역가는 드물다.
  

    4.6. 존대법의 양극화

  일부 어린이 책에 존대법이 지나쳐서 잘못 쓰이는 경향이 있다. 존대법이 혼란을 일으키면서 붕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할머니는 입이 크셨다." "할머니는 상냥한 분이셨다." 어린이와 청소년 책에서는 존대법이 겹치기로 잘못 쓰이는가 하면, 애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나이 차이가 있어도 존대법이 없어지는 현상도 함께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텍스트 전체에 존대법이 아주 많이 사용되는 것과, 다른 편으로는 미국말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대화에서 존대법이 줄어드는 일이 동시에 관찰된다.
  

    4.7. 정보화 시대 - 과학 책과 어린이 및 청소년 책이 많아짐

  이것은 우리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다. 청소년 책들은 이야기 중심의 책들, 곧 다양한 문학작품들이 많지만, 다른 한편 학습을 도울 목적으로 역사나 과학의 내용이나 정보를 담은 것들도 차츰 늘어나는 경향이다. 문학작품과 정보를 전달하는 책의 언어는 상당히 다르다. 순수한 정보전달의 도구로서의 언어의 쓰임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5. 맺는말

  앞의 내용에서 이미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마땅히 어휘로 구분하고 뜻을 번역해야 하는 말들을 고유명사로 구분하고 소리번역만 하는 일들이 많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외국말 용어들이다. 이것의 뜻을 번역하지 않을 바에야 아예 번역의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한 텍스트에서 중요한 용어들도 소리번역만 하고 뜻을 따로 설명하는 일들이 흔하다.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조차 없다. 모든 개념이 한자말로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전통의 후유증이다.
  이제는 정보가 너무 많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처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빠른 정보처리를 위해서는 누구나 말을 정확하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은 아주 좋은 말이다. 컴퓨터 시대에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한자를 자판에 집어넣느라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나? 우리는 그런 고생 같은 것은 아예 모른다. 그야말로 훌륭한 알파벳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이런 훌륭한 알파벳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금만 복잡한 내용과 개념은 모조리 한자말로 만들어 쓰면서 생고생을 하나? 어째서 우리말로 말뜻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개념들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안 하나? 용어가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어도 용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은 어차피 어렵다. 거꾸로 내용이 어려운 만큼 용어는 쉬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어가 오늘날 세계어가 된 비밀이다. 내용은 한없이 어려워도 말은 쉽다. 정보처리에서 말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우리말은 아주 훌륭한 도구로서의 특성들을 갖고 있다. 다만, 우리가 게을러서 그것을 제대로 만들어 쓰지 않고 있다. 먼저, 이것을 제대로 된 도구로 쓰려면 우리말로 새 낱말 만들기 규칙이 정확하게 서야 한다. 그것은 물론 정확한 문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동사 'read'에 새 낱말 만드는 말 조각 '-er'을 붙이면 'reader'가 되면서 읽는 것은 사람이나 기계를 모두 가리킨다. 우리말로는 이것이 어려운 한자말인 '독자'와 '판독기'로 나뉜다. 한자말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말로 동사 뒤에 예를 들어 '-이', '-기' 따위를 붙이는 식으로, 낱말 만들기 규칙을 찾거나 만들어 내고7)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말은 한자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영어와 같은 수준이 될 수도 있다. 한자말의 부담이 줄고 용어가 쉬워지면 누구나 바른 문장을 쓰기가 쉬워진다. 이것이 황홀한 망상일 뿐인가?
  그 옛날 뜻글자가 넘쳐 나는 한 가운데서 우리말 소리글자를 만들어 낸 세종대왕의 그 노력을 우리는 왜 안 하나? 세종대왕이 알파벳이라는 하드웨어를 만들어 남겼다면 우리는 왜 그에 알맞은 소프트웨어를 만들 생각을 안 하나? 세종대왕이 그 알파벳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우리말 입말은 아직도 어미말(母語)로 살아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오늘날 세계어와 맞먹는 합리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 우리말을 이렇게 함부로 한자말에 토씨나 달아 주는 하인처럼 부리고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말로 작으나마 시작을 할 때다. 네 시작은 작으나 그 끝은 위대할 것이라는 <성경>의 구절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6. 문헌과 출판사

◆ 황종인: 형식언어로서의 한국어(Korean as a Formal Language) 한국 외국어 대학교 독일어과 홈페이지http://maincc.hufs.ac.kr./ ~germanistik 교수진에서 황종인 항목으로 들어가 ‘읽을거리’에서 찾아볼 것.
◆ 황종인: 번역과 삐딱. 같은 곳
◆ 푸른숲
◆ 민음사
◆ 사이언스 북스
◆ 비룡소
◆ 소소 출판사
◆ 웅진 씽크빅
◆ 김영사
◆ 문학수첩 리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