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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연구원 10년사

회고와 바람

국어연구원 시절을 돌아보며

권인한 / 울산대학교 교수

필자는 1991년 1월 10일 연구원이 문을 연 날로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의 5년 2개월 가량을 국어연구원에서 일한 바 있다. 벌써 국어연구원도 개원 열 돌을 맞이하였으니까, 필자로서는 지난 10년의 절반은 국어연구원에서 나머지 절반은 대학의 강단에서 보낸 셈이 된다. 다시 한번 세월의 빠르기를 실감하게 되거니와, 30대 초반,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때를 보낸 연구원 시절은 필자에게 있어서 좀 더 특별한 감회로 다가오는 듯하다. 지난 추억들을 더듬으며 국어연구원 시절을 돌아보고자 한다.

우선 국어연구원 시절은 필자에게 너무나도 많은 행운을 안겨 준 때로 기억된다. 군복무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은사님들의 배려로 국어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었고(1990년 6월 1일~1990년 12월 31일), 그것이 인연이 되어 국어연구원의 개원과 함께 연구원의 막둥이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큰 행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대학의 문호가 좁아지기 시작한 때인지라 박사 과정에 적을 두고 있던 필자 또래의 친구들은 대학의 시간 강사 이외에 마땅한 호구지책이 없던 형편이었다. 이런 어려운 때에 연구원으로서 봉직할 수 있었던 것이 필자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필자는 연구원에서 굵직굵직한 연구들을 행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다. 북한어 연구, 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의 교육과 보급, 표준국어대사전의 편찬 등의 실무를 맡게 되면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배울 수 없었던 응용 분야에 대한 소중한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에 와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사전편찬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론, 국어정보학 등등의 시대적인 흐름에 크게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바로 이러한 연구원에서의 경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국어연구원 시절은 필자의 나이로 30대 초반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이 시절에는 상당히 의욕에 넘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를 들면, 1991년 7월 문익점의 달을 기념하기 위하여 '목화와 그 관련 어휘들의 어원 조사'라는 작은 보고서를 준비하던 때의 의욕적인 모습은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 대견한 듯하다. 그해 6월 25일경으로 기억되는데, 원장님으로부터 '목화'라는 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조사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조선왕조실록』에 그 최초 출현형이 있음을 알고는 보름 이상을 실록과 씨름할 만큼 의욕에 차 있었던 것이다. 실록의 색인을 바탕으로 '목화'가 나오는 기록들을 하나하나 뒤지면서 한 어휘의 생성·발전 과정을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즐거운 추억의 하나로 남아 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로 지치고 힘든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새롭게 의욕을 찾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의욕이 지나쳐 일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해외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사업의 첫해를 책임지면서는 과욕이 부른 잘못도 없지 않았다. 전례가 없던 일이어서 모든 것을 새롭게 개척한다는 생각으로 일에 임하였으나, 좀 더 잘 해 보고자 한 것들이 나중에는 화(?)를 자초한 결과로 남게 될 때에는 정말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알마티에서의 교육을 위한 교재들을 부칠 때에 당시 어지러운 러시아의 국내 사정으로 우편물의 배달이 원활치 못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유명 회사에 화물 운송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우송료가 당초 계획보다 턱없이 높아짐으로써 나중에 사업비 정산에 곤란을 겪었던 것이 그 한 예다. 나중에 문예진흥원 측과 결산을 하는 과정에서 원장님께 큰 걱정을 끼쳐 드렸던 일은 지금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연구원 시절에는 또 다른 개인적인 고충도 없지 않았다. 그 가장 큰 것이 연구원에서의 일과 개인적인 공부 사이의 괴리였다. 연구원에서의 일이 주로 실생활에 직결된 응용 분야였던 반면에 필자의 개인적인 공부의 욕심은 국어 음운사 방면의 탐구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구원에서의 마지막 3년을 사전편찬실에 근무할 때에 그 정도가 더욱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사전 편찬을 위한 발음 표시의 원칙과 실제를 정한다든가, 표준 발음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전공을 조금은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으나, 사전편찬실에서의 나머지 대부분의 일들은 필자의 전공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원고 집필을 의뢰하고, 집필된 원고들을 거두어들이는 한편으로 책정된 원고료를 지불하며, 더 나아가 편수원·보조원들에 대한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등 정말이지 국가 권위의 표준적인 대사전을 편찬한다는 사명감이나 책임감 없이는 버텨내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충에도 불구하고 미력이나마 대사전 편찬의 기초를 놓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사실 그러한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대학에서나 사회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에 큰 두려움 없이 임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국어연구원이 필자를 단련시켜 준 것에 고맙게 생각한다.

연구원 시절에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었다. 운현궁 가까이의 고풍스러운 가옥들이며, 국립극장 주변의 멋들어진 남산의 경관, 그리고 덕수궁 경내의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 이런 풍경들을 사시사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큰 즐거움이었다. 부장님·부원들과 함께 주말을 이용하여 유명산·설악산 등지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오색에서 시작하여 힘들게 오른 대청봉에서 바라본, 그때의 운해의 장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듯 보람, 즐거움, 회한 등등의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연구원 시절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이 비단 필자 혼자만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끝으로 훌륭한 청사에 새롭게 터를 잡은 국어연구원의 개원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지금까지의 업적 이상으로 더욱 알찬 내용의 성과들로써 새롭게 도약해 나가기를 마음으로부터 기원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