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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연구원 10년사

회고와 바람

국립국어연구원 개원 전후

안병희 / 초대·제2대 원장 역임·서울대 명예교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진부한 이 말도 실감이 날 때가 간혹 없지 않다. 개원한 지 10년이 되는 국립국어연구원(앞으로 연구원으로 줄인다)을 생각하면 바로 그 실감이 난다. 오늘날 연구원은 겉으로 훌륭한 청사를 준공하여 입주하였고 안으로 뛰어난 연구 인력으로 많은 업적을 쌓아 나라의 어문정책을 연구, 수립하는 중추 기관으로서 위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종로구 운니동의 덕성여대 별관에 세 들어 개원식을 하였을 때에 누가 오늘의 연구원을 짐작이나 하였을까. 겸직으로 있었던 우리야 잠깐 머물다가 떠나간 나그네와 같아서 별로 한 일이 없지만 붙박이로 그곳에 몸담은 연구관과 연구사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이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그들의 노고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마음으로부터의 축하를 드리고자 한다. 개원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개원한 연구원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개원을 전후한 이야기와 주요한 현안이었던 청사와 대표적인 국어사전 편찬 사업에 얽힌 이야기를 적어 개원 10주년을 축하하는 연구원에 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국어학계의 오랜 숙원은 국어정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합리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국가기관의 설립이었다. 몇몇 관료의 손으로 국어정책이 수립되고 추진되는 상황을 지양하여야 하는 당연한 바람이었다. 국어학의 학술 단체와 국어정책의 운동 단체에서 여러 차례 당국에 건의를 하여 왔었던 것이다.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의 개정 작업이 지지부진하게 되어 결말을 내지 못하게 되자, 그 사업을 담당하였던 문교부에서는 관료가 지닌 한계를 느껴서 별도로 독립된 국어연구기관을 설치하여 그것을 위임하여 마무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한 연유로 1984년 5월에 국어연구소가 학술원 산하의 임의 단체로 창설되었다.

그러나 국어연구소는 국어학계와 국어 단체에서 바라던 국가 기관이 아니었다. 모든 예산이 국고에서 지원되었지만, 법적으로 아무런 뒷받침이 없는 임의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기관으로 승격하여 줄 것을 국어연구소가 앞장서 요구하였다. 학계가 그것을 지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작은 국가 기관이라도 새로 설치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관으로서 예산 항목으로 올라야 되고 일정한 공무원을 배정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요구는 정부 조직을 모르는 사람들의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으로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부 조직이 바뀌어 문화부가 신설되고, 나라의 어문정책이 교육부에서 문화부로 이관되었다. 특히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어령 장관은 문화정책의 네 기둥을 주장하면서 그 하나로 올바른 어문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강조하였다. 문화부에 어문출판국을 두고, 그 안에 어문과를 두어 나라의 어문정책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에 어문정책을 전담하는 과가 중앙 정부에 생긴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李) 장관은 어문정책이 제대로 수립되기 위하여 임의 단체인 국어연구소를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인식으로 그 승격 작업을 추진하여 1990년 5월에는 정부 조직법 안에 국립국어연구원을 설치하는 규정을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가 기관으로서의 연구원은 법적인 토대가 마련되었고, 또 장관의 의지가 강력하였지만 실무를 담당한 관료의 헌신적인 사업 추진이 없었다면 연구원의 개원이 순조로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초대 어문출판국장으로 그 일을 강력하게 추진한 김광인(金光仁) 국장이 없었더라면 연구원의 개원이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광인 국장은 어문과장을 제쳐 놓고 어문과의 이성원 사무관을 데리고 개원에 관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연구원 청사의 임대에서 연구원의 직제와 정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연구원의 현관에 내걸 간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원의 청첩장 문안과 종이 선택도 김 국장의 작품이다. 직접 나서서 도와줄 처지가 아니어서 돌아가는 형편을 보고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간접으로는 얼마든지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완벽주의자인 김 국장의 노력으로 연구원은 이듬해인 1991년에 순탄하게 출범하였다.

연구원은 국어연구소를 모태로 하였다고 흔히 말한다. 위에서 국어연구소의 승격을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지로 당시 국어연구소의 책임을 맡은 내가 초대 원장이 되고, 연구원의 연구 인력이 거의 국어연구소에 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인사는 이미 연말에 내정되었으나 원장과 4, 5급 상당 연구관의 정식 발령은 1월 11일이었다. 6급 상당 연구사의 발령은 기관장인 원장이 하게 되어 잇따라 이루어졌다. 나는 국립 대학의 교수로 겸직 발령이었지만, 이들 연구관과 연구사는 이때에 비로소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그들은 뒤에 국어연구소에 근무한 경력에 따른 퇴직금도 지급받은 것으로 안다. 이런 점에서 연구원은 결코 국어연구소를 승계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국어연구소에서 연구직으로 있던 약간 명은 연구원에 발령되지 않았다. 연구관이나 연구사의 객관적인 학력을 석사 학위 이상으로 한 결과이다. 공무원법의 규정으로 특채할 수 없는 서무과 직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석사 학위 때문에 있은 연구직의 탈락은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여 업무 능력은 석사 학위 소지자에 결코 못지않은 사람도 있었으므로 연구원으로서도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국어연구소와 국어연구원은 엄격히 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점으로 국어연구소의 연구실장을 지낸 경력을 국가기관인 현 연구원의 그러한 경력으로 소개하는 일이 있어서 연구원에서 정식으로 항의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연구원의 직제(職制)는 원장 아래에 연구부와 서무과, 그리고 도서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연구부는 다시 연구1, 2, 3부로 나뉘었다. 1, 2, 3부란 명칭이 담당 업무를 명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서 1994년에 직제 개편으로 각각 어문규범연구부, 어문실태연구부, 어문자료연구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담당 업무는 변함이 없이 그전 그대로다. 정원(定員)도 한두 명의 출입이 있으나 대체로 출범할 당시의 그 정원이라고 듣고 있다. 어문출판국장이 연구원을 순탄하게 출범시켰을 뿐 아니라 연구원의 초석을 매우 튼튼하게 놓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 국장은 연구원의 산파(産婆) 이상의 일을 한 분이다.

연구원이 채 1년이 안 되는 사이에 법제화되고 연구 인력이 발령되어 출범한 것은 거의 어거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니 독립된 청사가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시 설명하겠지만 여러 곳으로 물색하다가 위에 말한 덕성여자대학의 운니동 캠퍼스의 교사(校舍)를 임대하기로 하였다. 연말에 가까스로 임대 계약이 성립되어 서둘러 강의실을 사무실로 개조하는 작업을 마치고 새해 초에 간신히 입주할 수 있었다. 컴퓨터를 제외한 국어연구소의 모든 사무 집기는 폐기하고 새 집기를 그럭저럭 갖추어 사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라 도배한 풀 냄새가 물씬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리하여 청사와 사무 집기도 갖추어져 연구원은 드디어 1991년 1월 23일(수요일) 오후에, 정확히 오후 3시에 현판식과 개원식을 가졌다. 며칠 전에 눈도 내려 쌀쌀한 날씨였으나 문화부 장관을 비롯하여 국어학계와 문화계의 귀한 분들이 좁은 청사를 꽉 채우고 연구원의 앞날을 축하하여 주었다. 이날로써 연구원은 그 출범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국어학계와 국어운동단체의 숙원이 풀린 날이 된 것이다. 내가 그날 그 행사의 중심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개인으로 보아서 큰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원은 위에 말한 대로 청사를 임대하여 개원하였다. 사실 문화부는 연구원을 신설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고 청사 문제는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설의 절차가 마무리되면 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되던 청사의 임대가 쉽지 않았다. 문화부 소속 기관의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정부 부처의 건물에도 여유 공간이 없었다. 민간 소유의 건물을 임대할 수밖에 길이 없었다. 문화부와 가까운 곳에 200평 정도의 공간을 물색하였으나 적당한 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요행히 국어연구소가 세든 건물의 소유주인 덕성학원과 교섭하여 덕성여자대학 운니동 캠퍼스의 별관 2, 3층을 임대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 별관은 위치가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자리하고 있어서 다른 건물들과 떨어진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 법인의 건물은 유상(有償) 임대가 불가능한 제약이 문제되었다. 학교 법인을 관장하는 교육부와 교섭하여 문제를 해결한 어문출판국장이 자세한 경위와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렵게 임대하여 준 건물에 청사를 마련하게 되었다.

임대한 별관은 위치는 좋았지만 사무실로는 적합한 건물이 아니다. 원래 강의동(講議棟)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게다가 요즘의 대학 강의동과는 달리 상당히 낡은 건물이다. 약한 바람에도 창문이 흔들리는 교실이었다. 화장실도 임대한 건물의 1층 바깥에 별도로 부속되어 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건물의 교실을 한겨울에 사무실로 개조하였으니 이름이 연구원 청사이지 '가청사(假廳舍)'라 하여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개원된 연구원의 연구관이나 연구사로 발령받은 사람들이 그런 청사에 대하여 불평은커녕 맡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한 일은 지금 돌이켜보면 고마우면서도 미안할 뿐이다.

그러한 청사의 임대도 개원에 쫓긴 임시 조치였다. 적지 않은 임대 비용도 다른 예산을 한시적으로 전용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래 임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정부, 특히 문화부 산하 기관의 건물을 물색하여 청사를 새로 마련하여야 되었다. 마침 그때에 중구 장충동의 국립 극장 구내에 있던 국악고등학교가 강남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비어 있었다. 이 교사에 욕심을 가진 기관이 문화부 안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사용 계획을 가진 기관도 있다고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어령 장관이 1991년 후반에 그 교사를 연구원 청사로 사용하도록 결정을 지어 놓았다. 연말에 장관이 경질되자 교사 사용에 대한 잡음이 다시 생겨났다. 다행한 일은 당시 허만일(許萬逸) 차관이 연구원이 그곳으로 이전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하고 추진하여 준 것이다. 3월 초에 우리를 직접 데리고 현장 답사도 하고 빨리 내부 수리를 하여 이전하도록 관계관에게 지시한 것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분들의 배려와 후원이 있었기에 연구원의 오늘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 곡절을 겪어서 1992년 3월 초에 곧장 내부 공사를 거쳐 3월 중순에 운니동에서 국악고등학교의 옛 교사로 연구원은 이전하였다. 현판식은 3월 18일 오후에 있었고 잇따라 간단한 축하 모임도 있었다. 개원식과 마찬가지로 많은 분이 오셔서 새 청사의 이전을 축하하여 주었다. 그러한 축하에 어울리게 청사는 만족스러웠다. 다 같은 교사이지만, 더욱이 고등학교 교사였지만 운니동의 청사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건물이었다. 사무실의 공간도 거의 배가 되었다. 거기에 환경도 더없이 훌륭하였다. 계절마다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남산 산책로의 봄, 가을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조금 일찍 출근한 아침이나 점심시간의 산책은 청사의 고마움을 절로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청사에 걸맞게 연구관이나 연구사들은 더욱 열심히 연구 사업에 종사하였다. 연구원의 대표적인 사업인 국어사전 편찬의 방향과 골격이 잡히어 본격적인 작업 착수도 그 청사에서 한 일이다.

힘들게 옮긴 청사도 오래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1993년에 음악원만으로 개교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이듬해 봄에 연극원이 개원되는데, 그 교사로 연구원 청사가 배정되어 연구원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이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연말에 확정된 모양이나 연구원으로 통보된 것은 1994년 1월 초순이었다. 처음에는 좀 더 나은 청사를 물색해 보라고 하다가 뒤에 미술관의 1, 2층을 문화재관리국과 같이 사용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물색은 빈말이고 미술관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명분 축적을 위한 핑계가 아니었나 한다. 개원할 때의 그 같은 물색이 도로(徒勞)에 그친 경험이 불과 3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든 개원한 지 겨우 3년이 조금 지났는데 다시 청사를 옮기게 되었으니 딱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연구원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능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원에는 잘못인 줄 알지만, 솔직하게 말하여 그때부터 임기가 끝날 날만 기다리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2년 남짓 있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던 장충동에서 6월 초에 덕수궁으로 이전하였다. 또 현판식을 갖는 일이 창피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연구원 직원만으로 간단히 간판을 달았다. 1994년 6월 4일 10시 30분의 일이다.

연구원이 국립 극장 구내에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전 이유의 하나로 든 것을 알고 있지만, 덕수궁은 그보다 몇 배 연구원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봄, 가을에는 고궁(古宮)으로 오는 시민과 어린 학생으로 조용한 연구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간도 장충동 청사보다 훨씬 좁았다. 사전편찬실은 시장을 방불케 해서 지나다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자료실은 책을 빼곡히 쌓아두는 창고 바로 그것이었다. 직원이 모두 모이려면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이나 궁중유물전시관의 강당을 빌려 써야 되었다. 거기에 함께 입주한 문화재관리국은 정부의 대전 청사가 준공되는 대로 그곳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그럴 경우에는 연구원도 이전하여 미술관이 본래의 기능을 갖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본부에서 연구원 청사를 건립할 대지부터 구입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해 7월 중순에 강남구 염곡동의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동 대지를 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연구동은 초빙된 외국 학자를 위한 숙소 건물로, 골조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나 정부에서 예산을 이유로 숙소 사업을 취소하여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있었다. 8월 초에 연구부장들과 둘러보았는데, 교통이나 환경이 연구원 대지로 적격이었다. 연구원에서는 크게 찬성하면서 대지를 구입하고 골조의 내부를 약간 수정하여 이듬해부터 공사를 계속하여 준공을 서두르도록 본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내가 연구원을 그만둔 이듬해인 1995년에 골조의 하자(瑕疵)가 문제 되어 그 대지가 강서구 방화3동으로 대토(代土)되어 오늘의 새 청사가 세워진 것이다. 오랜 셋방 신세를 벗어나 온전한 청사의 주인이 되었다. 지나치게 서울의 서쪽에 있다는 흠이 있으나 염곡동보다 넓은 대지에 더 넓은 사무실 공간을 가졌으니 좋은 일이다. 이제 연구원은 독립된 청사를 갖고자 한 숙원이 해결되어 연구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 더욱 큰 발전을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다.

개원과 동시에 연구원은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우선 연구원을 국내외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여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언론 매체에 홍보하는 데 신경을 썼다. 다음으로 어문 규범을 널리 알리는 사업의 하나로 '가나다 전화'를 운영하여 국어와 한글에 대한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었고, 조선일보사와 함께 언어 예절을 바로잡는 사업도 전개하였다. 연구 사업으로 북한어의 연구와 국어의 실태 조사, 한자의 약자 조사를 추진하였다. 국어정책과 국어학의 주제를 하나씩 특집으로 한 『새국어생활』을 계간으로 발간하고, 해마다 국어정책과 국어학의 주요 성과와 문제를 종합하고 정리한 『국어학연감』을 발간하여 국어정책 수립과 국어학 연구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대외 사업으로는 중국과 옛 소련권의 한국어 교사를 국내로 초청하거나 전문가를 파견하여 그 교사들에게 우리 어문 규범을 강의하여 북한의 규범에 따르던 그곳 동포들의 국어생활을 우리 규범에 따르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남북의 언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북한의 국어정책 당국자와 회동을 추진하여 두어 번 접촉은 하였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이러한 사업들이 대부분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데, 처음 그것을 계획하고 추진한 한 사람으로서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연구원의 가장 큰 사업은 『표준국어대사전』의 편찬이다. 어림잡아 100만에 이를 국어의 어휘를 수록하여 어문 규범에 따른 표기와 발음을 제시하고 정확한 주석을 붙여서 21세기 국어생활의 길잡이가 될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일이다. 소요 예산은 한 항목당 1만 원으로 계산하여 100억 원이 되고 발간까지 10년이 걸리는 장기 사업으로 계획되었다. 그 사업은 새로 발족한 문화부의 주요 사업의 하나로 선정되어 1991년 3월 말에 이어령 장관이 청와대에 보고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연구원은 시중에 나와 있는 국어사전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사전학의 이론을 참고하면서 우리 나름으로는 제법 치밀한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였다. 문화부의 내부 검토에서는 약간의 수정으로 무사히 통과되었으므로 이듬해부터는 사전 편찬에 착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다. 지금은 달라졌으리라 믿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장관의 결재가 나고 대통령의 재가가 있은 사업이라도 경제기획원의 실무자가 그 필요성을 납득하지 않으면 아예 예산 항목으로 오를 수도 없었다. 실무자를 상대로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항목으로 올리고 예산을 한 푼이라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중에 여러 종류의 국어사전이 이미 나와 있는데 국가기관에서 많은 예산으로 또 하나의 사전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실무자의 주장이었다. 계획서에서 그 필요성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10년이라는 장기 사업이 쉽게 승인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사전편찬의 이론을 설명하고, 시중의 사전에는 주석에 국어학계의 성과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서 문례(文例)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완벽한 국어사전을 편찬하여야 하는 사업의 당위를 말하였으나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결정적인 이유, 그들이 납득할 수 있어서 그들 스스로 상급자를 자신있게 설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겠으면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충고 아닌 충고만 되돌아왔다.

여기에서 연구원은 편찬 사업을 위하여는 결정적인 명분을 찾아야 하는 막다른 길목에 섰다. 그 명분은 학문적인 이론만으로 뒷받침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획원에 드나들면서 터득하였다. 기획원 실무자가 수긍할 명분은 오히려 어떤 정책적인 바탕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북한어를 사전에 대담하게 수록한다는 편찬 방침이다. 그때에는 북방 정책이 정부의 시책으로 추진되던 상황이었으므로 그 방침은 편찬의 명분으로 실무자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졌다. 그런데 당시 학계에서는 표준어와 다른 북한어는 방언의 하나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에 대한 고려도 하여야 되었다. 예산이 확보되더라도 편찬에는 학계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구어로 존재하지만 북한어는 그들 나름의 규범을 가지고 서사어(書寫語)로 사용되는 사실을 그 편찬 방침의 또 다른 이유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북한 서적이 공공연하게 판매되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도 꽤 많은 북한 서적이 복제되어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실용적인 이점도 없지 않았다. 거기에 중국이나 옛 소련 땅에는 우리 동포가 이주하여 100년 전후로 독자적인 생활을 하여 왔으므로 그들 나름의 독특한 말이 있다. 이들 말도 북한어와 함께 사전에 수록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종으로 5000년이란 오랜 기간에 사용되고 횡으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용되는 국어의 모든 어휘를 종합하여 수록하는 『종합국어대사전』의 편찬 사업으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당시에 이러한 방침으로 편찬된 사전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연구원의 계획은 매우 훌륭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수정된 계획서는 5월 말에 제출되어 그 완강하던 기획원 실무진도 국어사전 편찬이라는 장기 사업을 받아들여 주었다. 10년에 총예산 100억이라 하였으나 제1차 연도인 1992년도에는 겨우 2% 정도의 예산이 배정되었다. 연구원으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액수가 아니었지만, 문화부 예산담당관실은 장기 사업이 확정되기가 어렵지 한번 확정되면 연차적으로 증액된다면서 오히려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1992년부터 국어사전의 편찬은 착수되었다. 문화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학계의 원로를 위원으로 한 사전편찬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자문기구로 삼고, 연구원의 내부 규정으로 사전편찬실을 두어 연구관과 연구사를 배치하고 따로 임시직 편수원을 모집하여 기초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예산담당관실의 말과는 달리 1993년도의 예산도 별로 증액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봄에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3월 중순에 새 차관에게 연구원의 업무 보고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차관이 편찬을 5년 안에 앞당기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렵다고 판단되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나왔는데, 그 자리에 배석하였던 신현웅(辛鉉雄) 국장이 대통령의 임기를 고려한 정치적인 주문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예산 확보에 유리할 것이라는 귀띔을 주었다. 1차 연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2차 연도의 예산도 실망스럽던 차에 신 국장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여 계획을 단축하였다. 과연 그 뒤로 예산은 대폭으로 증액되었다. 신 국장은 곧 청와대 교문수석실의 비서관으로 승진되었지만 사전의 편찬 사업에 음으로 양으로 계속 도와주어 여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산의 증액으로 편찬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단축할 때에 예상한 대로 5년은 무리여서 다시 2년이 연장되어 작년 곧 1999년 10월의 한글날에 마침내 『표준국어대사전』이란 이름으로 완간되었다. 처음 편찬을 시작할 때의 이름도 바뀌었지만, 중국이나 옛 소련의 국어를 수록한다는 계획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밖에 불만과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어떤 사전이든지 완벽한 것은 없다. 더욱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으로 수정 작업을 계속하여 이름에 걸맞게 국어생활뿐 아니라 국어사전의 표준이 되기를, 그 사전 편찬을 계획하고 착수한 사람으로서 바라 마지않는다.

연구원은 개원한 지 겨우 10년이다. 그 사이에 훌륭한 시설과 연구 인력을 갖추었고 국어사전의 간행을 비롯한 많은 업적을 쌓았다. 누구나 국어 문제와 어문정책은 연구원에 문의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연구원 안의 연구관이나 연구사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밖에 있는 국어학자들의 협력이 컸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문화체육부, 문화관광부로 이름이 바뀐 문화부의 장관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컸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분들의 힘이 아니었으면 연구원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있었다 하여도 훨씬 어려운 길을 걸었음에 틀림없다. 개원으로부터 4년 동안 연구원에 있으면서 알게 된 그분들의 이름을 실명(實名)으로 여기에 적어 두었다. 물론 이름을 적지 않은 분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그 가운데서 여기 적은 분들은 연구원에 관계하거나 앞으로 관계할 사람이 반드시 기억하였으면 하는 사람이다.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이름을 올려서 거명된 분께는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연구원에 크게 도움 준 분들을 기록에 남기고자 한 충정의 발로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오늘날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되도록 정부의 규제나 관여를 줄이거나 없애려는 흐름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어문정책을 다루는 국가 기관은 사회주의 국가에나 있는 것이란 말도 들린다. 예외가 일본의 국립국어연구소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이 언어 문제가 심각한 점도 있지만, 2차 대전 직후 미 점령군에 의하여 한자 사용의 폐지 또는 제한 등 일본어의 개혁을 강력하게 권고받자 그것을 완화하는 뜻도 있어서 설치하였다는 말이 있다. 진위는 어떻든 어문정책을 다루는 국가기관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흔치 않다. 그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연구원의 위상이 언제나 오늘날과 같으리라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있는 숱한 언어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 방안을 강구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연구원의 위상은 굳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개원한 뜻을 살리는 길이면서 동시에 연구원의 오늘을 있게 한 분들께 대한 보답임을, 연구원의 주인인 연구관과 연구사 여러분에게 감히 당부하고자 한다.